업무 차 지방출장을 갔다가 올라올 때 기차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잠시 기다리는 시간에 기차역 구내에 있는 작은 책방에서 시간을 죽이던 중 신간 베스트셀러자리에 놓인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먼저 제목이 눈에 띄었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대부분의 경우 –물론 회사 일 때문이지만 - 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선뜻 책을 사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
먼저 이 책은 신문사 기자 – 개인적으로 기자라는 사람들은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많다. 별 것도 아닌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면서 대하기가 쉽지 않은 경험이 많았던 것 같다. - 로 일하던 저자가 독립하여 미디어사업 등에 종사하면서 직, 간접적으로 겪거나 느낀 점을 정리한 책으로, 저자가 을로 살면서 깨달은 노하우와 한발 앞서 나아가 갑이 된 을들의 필살기(?)를 기록한 것이란다.
책을 읽고 난 뒤에 느낀 점은 대부분 이해도 되고 한 두 번은 겪어봤던 기억도 희미하게 나는 내용들이고, 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도 잘 지적해준 우리사회에서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일부를 제외하곤 한 번쯤은 읽어봐야 될 책이라 생각된다. 그것도 반성을 하면서. 특히 갑들은.
그러나 물건의 납품이나 용역(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생기는 경우와 같은 좀 더 처절한 갑과 을의 생존게임과 울지도 웃지도 못할 비화에 대해서는 활자화의 어려움 때문에 많이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기도 하다. 다음에 ‘을의 생존법2’가 나올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글쎄다.
또 옥에 티랄까 무척 아쉬운 점으로는 각 장의 시작부분에 있는 인용구에 많은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우연히 하나를 발견해서 몇 개를 확인해 보았지만. 이 인용을 저자가 직접 찾아서 인용했는지는 약간 의심이 든다.
책의 본문에서 찾은 오타 또는 오류의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 86페이지 인용구의 저자인 Arthur C. Clark는 Arthur C. Clarke가 맞는 이름.
- 147페이지의 순류 스즈키: 스즈키 순류(Suzuki Shunryu, 鈴木俊隆)이라 쓰는 것이 올바른 표기. 또 출생년도는 영문Wikipedia에 의하면 1906년이 아닌 1904년 생
- 169페이지 부커 워싱턴의 인용구: “성공은 삶에서 당신이 도달한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그 동안 당신이 극복한 장애물이다.”를 “성공은 삶에서 당신이 도달한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그 동안 당신이 극복한 장애물에 의해 평가 받아야 한다.”(“I have learned that success is to be measured not so much by the position that one has reached in life as by the obstacles which he has overcome while trying to succeed.” in Up From Slavery)로 번역되어야 할 것 같다.
- 174페이지의 “낙타의 코”란 책의 저자는 ‘쿠누트 슈미트’가 아니라 ‘크누트 슈미트-닐센’(Knut Schmidt-Nielsen)(1905-2007)임.
- 205페이지와 214페이지의 인용구에서 ‘이야가와 이쿠오’ <이상한 동물이야기 2>는 ‘하야가와 이쿠오(早川 いくを)’ <이상한 생물이야기 2>가 정확한 저자와 번역된 책의 이름임.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갑’과 ‘을’이란 표현을 쓰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갑’이라 불리는 위치에 있거나 또는 ‘을’이라 불리는 위치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이 ‘갑’과 ‘을’의 관계라는 것이 원론적으로 보자면 고객(또는 사용자) 대 (어떤 형태의 제품이든지 용역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의 관계를 세속적으로 지칭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고,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이런 관계는 세계 어디에나 존재할 수 밖에는 없다. 유독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개인에게 제품을 사고 파는 고객과 판매자의 경우에는 갑과 을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다만 회사 대 회사의 거래에서 사용자(구매자)와 제공자(공급자)의 관계에서 유난히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 저자가 ‘대한민국에서 갑-을은 상-하와 같은 의미이다’라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시피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우리나라 (또는 일부 후진국)에선 갑과 을이 대등한 협력자의 관계가 아닌 과거 시대의 유물이라 할 수 있는 상-하 또는 주-종 관계의 시대를 탈피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 비극적이기도 하고, 유쾌하지 못하지만 을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필요악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서양 선진국의 경우라면 갑과 을일지라도 상호 동등한 관계에서 윈앤윈(WIN-WIN)을 이루는 것이 조금은 더 가능할 것 같지만 – 실은 좀 파고들면 서양 선진국에도 왜 갑과 을관계가 없겠느냐 만은, 다 사람끼리 부딪치며 살아가야만 되는 세상인데 - , 우리의 경우는 이런 경우는 상당히 드믄 경우라 생각된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태생에서 갖고 있는 원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상황이라면 더욱더 극단적으로 나쁜 부분 때문에 을이 갖는 힘든 점이 많을 것이다. 이러한 갑을 관계에서 을의 입장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을 저자는 “전생에 죄를 지은 사람이 지니고 가야 할 형벌” (125페이지)이라는 조금은 극단적인 표현까지도 쓰고 있다.
세상에서 갑과 을의 관계는 보다 다양한 경우에 성립할 수가 있다. 협의로 보자면 개인 대 개인 또는 회사 대 개인 또는 회사 대 회사의 경우가 있을??정 집단, 시장 등 좀 더 큰 범위의 것들도 갑으로 존재하고 갑과 같이 행동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 회사를 다니거나 사업을 하면서 상정할 수 있는 갑과 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 직장에서라면 회사 대 종업원, 상사와 부하
- 거래관계라면 계약자(소위 거래처)와 공급자
저자는 이 책에서 위의 여러 가지 경우의 갑과 을의 상황을 섞어서 기술하고 있어 조금은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갑과 을의 관계라면 통상적으로 거래처와의 업무를 하면서 계약자와 공급자(또는 납품자)를 의미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비즈니스에서 갑을 관계를 맺어질 때 을을 ‘을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갑은 대가를 지불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어지는 저자의 부연설명에 따르면,
- 실제 노동에 참여하고, 더 많이 일하는 쪽이 을이다.
- 갑보다 을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훨씬 많다.
-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소수의 갑이 아니라 다수의 을인 셈이다.
- 을은 강한 갑 밑에 억눌려 사는 약자다. 즉 을은 갑보다 힘이 없고 갑에 매여있고, 갑의 수혜를 입고, 갑 없이는 못 살고, 갑의 눈치를 보며, 갑이 하라는 대로 하고, 갑이 부르면 달려가고…
자신이 하는 일이 갑에 가까운지 아니면 을에 가까운지는 105페이지에 있는 간단한 ‘갑-을 진단법’으로 쉽게 알 수 있단다. 스스로 자신이 직접 이 진단표에 따라 답을 해본다면 흥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많은 몸으로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을의 입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기분이 상할 때도 많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되나 하나 자괴감 같은 것들이 들들 때 많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을의 상대방인 갑의 담당자와는 개인적으로 아무런 감정이 없고 다 이해한다고 하지만, 갑의 담당자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공무원(공기업)과 대기업의 경우는 소위 관료주의나 대기업병 때문에 아무리 좋은 개선 방안이 있어도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리스크(Risk)를 지지 않고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위한 - 예를 들면 장기적 성과나 투자효과보다는 단기적인 원가절감 – 이유로 인해 무리하고 비합리적인 갑의 요구를 겉으로 웃으며 억지로 수용해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때도 많았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일 경우 갑인 회사에 대항하는 약간은 냉소적이고 자기도피적인 것들에 대한 저자가 제안(?)하는 갑의 횡포에 맞불을 놓는 을의 황당한 생존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p.70-75)
- 무능해 보이면 생존한다. 다만, 무능하게 보이는 것을 생존 비법으로 삼는다면, 온갖 수모를 참고 이겨낼 인내가 필요하다. 주변의 비아냥거림과 질타에 아랑곳없는 뻔뻔함도 필수다.
- 적당히 찍히면 생존한다.
- 일을 못해도 회사에 도움이 되면 생존한다.
- 윗사람에게 잘하면 생존한다.
- 말이 능하고 포장을 잘하면 생존한다.
- 못되게 굴면 생존한다.
- 때론 사표를 내면 생존한다.
또 한 개인의 개성과 고유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방치하거나 원천 봉쇄하는 갑(회사)의 짧은 안목과 무능함이 안타까운 경우인, 갑인 회사가 을(직원)을 망치는 경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p.76-80)
- 직원의 능력을 활용하지 않는다.
- 한 곳에 전력투구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 개인의 꿈은 묵살한다.
- 직원의 엑기스까지 뽑아 먹는다.
- 직원의 사생활에 무관심하다.
- 적성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 직원의 미래는 배려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회사인 갑과 직원인 을 모두에게 손해가 나는 일인데도 글쎄 쉽게 개선되거나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상의 회사의 속성상 어떨 수 없는가 보다라고 그저 한숨만 쉬거나, 비슷한 처지의 동료직원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회사 및 상사에 대한 험담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일들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저자가 본 잘못된 갑과 을의 전형으로는 “매일 굴복하며 사는 사람은 을이다. 매일 똑 같은 일만 반복하는 사람은 을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편한 것만 좋아하는 사람,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급급한 사람은 을이다. 반면 남을 배려하지 않는 독선적인 사람, 허세부리고 거드름 피우는 오만방자한 사람, 봉사하는 자세가 없는 이기적인 사람은 갑이다”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주위에서 들은 대부분의 경우 – 물론 과장되고 단순화되어 전달된 경우가 많겠지만 – 이런 잘못된 유형의 갑과 을이 꽤 있는 것 같다.
이런 잘못된 갑과 을의 전형을 타파하기 위해, 저자는 갑과 을을 각각 분류하여 잠자는 을, 깨인 을, 잠자는 갑, 깨인 갑과 위대한 갑으로 나누고 있다. 깨인 을이란 스스로 을임을 확실히 인지하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이들이다. 위대한 갑은 을로부터 출발해 진정한 갑이 된 사람들.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삶의 바닥을 경험해본 이들이며, 카리스마와 열정, 도전정신, 모티베이션, 헌신, 그리고 비전이 그들의 덕목이다. (p.102-104)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인 을과 위대한 갑이 필요한 것이다.
깨인 을이 되기 위해 을에게 필요한 5가지 마인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Modest(자신을 낮춰라) - 겸손과 절제와 배려. 사람이 하기 가장 어려운 것들 중 하나이다.
- Service(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봉사하라) – 을은 을로 살아가기 위해 봉사를 해야 한다. 사실 돈 없고 힘없는 을이 돈 많고 권력 있는 갑보다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봉사다.
- Open mind(열림 마음을 가져라) – 열란 마음이란 선입견을 거둔 사고, 적을 만들지 않는 마름,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눈, 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자세가 그 것이다.
- Idea(늘 새롭게 발상하라)
- Passion(열정을 품어라)
저자가 말하는 을에게 필요한 갑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신을 밀어주고 이끌어줄, 즉 멘토가 되어줄 갑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비즈니스를 도와줄 갑이다. (p.231)
그리고 을이 가끔은 갑의 자존심에 불을 질러, 지고 싶지 않은 갑의 경쟁의식을 발동시켜, 을의 계획대로 움직이게 하는 지혜가 필요할 때도 있을 것 같다. 또 물론 거래처인 갑을 골탕먹일 수 있는 을만의 고유한 생존법도 다양하게 있을 것 같다. 이 땅의 모든 을들은 경험으로부터든 주위로부터든 한 두 가지 정도는 이런 생존법을 꼭꼭 숨기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좀 있으면 내 나이가 50인데, ‘나이 오십에 을로 사는 것은 가시밭길이다.’(250페이지)라는 구절이 가슴을 찌른다.
저자가 책의 끝부분에서 언급한, 행복은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일이다. 지금 옆자리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자. 직장에서는 직원들을 기쁘게 해주고, 집에서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면 된다. 사업을 한다면 만나는 이들 모두 내가 기쁨을 줄 수 있는 상대가 된다. 그렇게 한다면 고달픈 을 노릇이 그렇게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맞는 말이고 마음에 와닿는 말이다. 우리 모두 깨인 을과 위대한 갑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노력하는 자세로 일을 하고 상대방에게 대응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끝>
같은책 다른리뷰 | 이 책에 대한 다른 리뷰도 읽어보세요.
54/100 을의 생존법
이전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