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공부 사람공부]

고등학교 시절.

미술시간 숙제로 몇 번씩이나 미술관을 찾아갔어야 했다. 갤러리들을 다니면서 입장권을 붙인 리포트를 제출해야 했기에 미술을 좋아하든 말든 일단 가 보았다. 예체능 쪽이라면, 음악이나 미술 이런 - 딱히 정답이 없는 과목에 대한 '감상'을 쓰라고 할때엔, 내가 잘 쓰고 있는지 몇 번이나 궁금했다.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쓰는지, 베토벤의 '운명'이라는 노래를 들었을때 그 느낌은 무조건 운명적인 무엇이어야 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아닌데... 사람마다 다르니 느끼는 것도 다른 것이 정상일 텐데 그땐 그저 남들과 비슷하게 해야만 정답인 줄로만 알았다.

현대 미술, 고전 미술, 그 외에도 여러 다양한 장르가 있는 그림은 나에겐 그저 두가지로 일축되었다. 구체적인 그림 혹은 추상적인 그림. 추상화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고 페인트로 낙서만 해놓은 것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은 그것들이 훌륭하다고 하지만. 그리고 그 반대는 그저 일상 생활이나 인물화나 풍경, 혹은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혹은 새롭게 그렸지만 어떻게든 주제가 확연히 있는, 이 사람이 뭘 그렸구나 하는 것은 알 수 있는 그림이다.

옛날 한국 사람들이 그린 그림은 어떠했을까. 종이도 구하기 어렵고 지금처럼 미술도구가 풍족하지도 않았을텐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해설에 연신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 이것이 진짜 그림을 보는 사람의 평가구나! 라는 느낌이라니...

그림 딱 하나만 소개해 보자면, 그것도 저자분의 감칠맛 나는 해설이 있었기에 그림이 더욱 신비롭게 와 닿았지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6세기 말에 그려진 이경윤의 '관폭도'라는 작품이다. 글 말고 그림을 먼저 보았다. 웬 중국의 삼국시대 현인 한명과 그 아들 혹은 조카 정도로 보이는 장난기 가득한 어린아이 두명이 왼쪽 아래로 위치하고 있다. 옛날 폭이라 색깔도 희미하지만 뒤로 보이는 나뭇잎의 싱그러운 모습이 보이는 듯하고,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친다. 그가 바라보는 곳을 눈으로 따라가 보니, 하늘에서 물줄기가 두갈래 흘러 내려온다. 아... 게다가 워낙 세찬 물줄기라 그 물을 맞는 표면에서 다시 물보라가 되어 마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듯이 그림 전체에 하얀 물분자가 가득하다. 아니?? 이것을 정말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색이 바래서 이렇게 보인 것일까.

폭포를 그려봐라! 라고 나에게 누가 부탁한다면, 어느 정도 그릴까 하다가 두손들고 포기할 것이다. 어떻게 그리는가?? 물줄기를... 심지어 물방울 하나를 그림으로 그리라고 해도 그 오목함과 볼록함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텐데, 하지만 내 상상을 뒤집어 버리고 이 그림에서는 그저 가벼운 붓터치 몇번으로 완벽하게 폭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전에도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를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놀리는 것 같은데도 휙휙 순식간에 작품이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마치 그가 뇌에서 시키는 그대로 따라 그리는 듯한...

'관폭도'에서는 작가가 '여백'에 관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지금도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크레파스를 들고 온 스케치북 가득 해와 산, 집과 가족으로 물들이겠지. 하지만 그림 절반 이상이 텅 비어 있는 이 그림에서도, 무언가 꽉 찬 것이 느껴진다. 옛 한국 선비들의 그림실력,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 그 그림을 해석하는 분의 달콤한 설명을 듣자하니, 마치 미술관의 한 중턱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림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이 없지만, 무언가 소중한 가르침을 받은 듯한 이 책, 전공이 그림이 아닌 사람에게도 감히 추천사를 남기며 글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