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채봉” 작가님의 성함을 처음 본 건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라는 “정호승” 작가님의 산문집 이었다.

305페이지부터 부분 부분

“동화작가 정채봉 형과 함께 수원에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형는 화서역 부근에 살았고, 저는 율전역(현재 성균관대역) 부근에 살았습니다. 원래 형과는 월간”샘터“ 편집부에서 같이 일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샘터“에서 일할 때는 형이 제 윗사람이었던 탓으로 그리 가까이 지내지 못하고, 오히려 제가 ”샘터“를 그만두고 나서 더 가까워 졌습니다.

...... 저도 형이 병상에 있을 때 그 말을 했습니다.

“형, 이제 형한테도 실뭉치가 풀리는 일만 남았어. 그러니 힘내!”

형이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나 형의 그 실뭉치는 그만 죽음을 통해 풀려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형의 그 말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제 삶이 흠들 때는 ‘이제는 실뭉치가 풀리는 일만 남 았다’ 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정말 그때부터 실뭉치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합니다. 풀리는 실로 어떠한 옷을 새로 짜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게 됩니다.”

그 때 나는 “정채봉 작가님?”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인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집에 정채봉, 류시화 엮음 “작은 이야기2” 가 있었던 것이다.

작가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에 작가님의 책을 읽어 보겠다고 다짐 했다.

내가 고른 책은 “좋은 예감” 이라는 제목의 에세이 이었다.

작가님은 꽃을 보고 꽃의 이름을 많이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도 많다고 하셨다. 특히나 “동백꽃” 이라는 꽃 이름이 종종 나온다.

“채송화 채 봉숭아 봉” 이라서 그런가? 정말?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은은한 은율이 많다는 것과 시적 감각이 뛰어 나시다는 것이다. 역시나 “성인 동화” 라는 새로운 문학 용어를 만들어 내신 분이시구나 하는 프로필을 보며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자연적인 묘사 능력이 필력이 되어 물 흐르듯 적으신다. 정말 글을 잘 쓰시는 분이시다.

항구에 대한 묘사나, 꽃이나 나무에 대한 묘사도 뛰어 나시다.

마음이 따뜻하시고 그 따뜻한 기운이 내 몸을 담쟁이 넝쿨처럼 휘감는다. 그리고 작가님의 기운을 받는다.

“아 따뜻해”

심금을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는 바람 한 줄기도, 시냇물 소리도, 나무 흔들리는 소리도 비교 안 될 만큼 아름답다.

내 주위에 공기청정기를 틀어 놓은 것도 아닌데 자연적으로 마음이 정화 된 기분이다.

이 책은 1부부터 4부로 나눠어져 있는데 1부와 3부는 그때 그때 쓴 에세이를 모은 것이고 2부는 “맑고 향기롭게” 모임의 지면에 다달이 쓴 편지글이고 4부는 여성지 “우먼센스”에 연재 했던 글이다.

읽다 보면 1995년 상품백화점 당시 붕괴된 곳에서 박승현 양이 살아 있어서 고맙다는 식의 글이 나온다.

읽으면서 이 책이 이리 오래 되었나? 하는 생각에 머리말을 다시 보니 1996년 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그것 빼면 좀 오래된 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 아마도 그건 현대 사회와 거의 매치가 돼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작가님 어릴 적 얘기도 나온다. 엄마 얘기, 할머니 얘기, 이모 얘기, 정채봉 작가님 얘기, 가시내 얘기, 그런 것들은 향수에 젖어 추억에 잠겨 추억손수건이 물드는 느낌이다. 그 손수건을 꺼내면 추억의 향기나 나는 것처럼.

그리고 창작 동화는 재밌다. 그냥 재미있는데 아니라 감동을 섞고 주제를 넣어 생각을 음미할 시간도 주기 때문에 간이 딱 맞다.

짜지도 맵지도 싱겁지도 않다. 밥과 먹으면 자연 보양식인거 같다.

어떤 글은 초등학교 책에도 실렸다고 한다. 어쩐지 예사 롭지 않더라니까.

지금 정채봉 작가님은 많은 사람들의 그리움 속에 마음속에 간직되 있다.

2001년 1월 눈 내리는 날.. 세상과 작별 하셨다.

하지만 작가님의 아름다운 심성은 고이 접어 내 심장에 붙여 놓을 것이다.

깊은 울림이 있는 문체는 작가님만이 갖고 있는 색깔이니까.

그 색깔에 나를 물들여야 겠다.

자연적인 묘사와 내가 마음에 들었던 명언을 몇 개만 적어 보겠다.

24. 실바람 잠든 모습 같은 순백의 박꽃이 이때 피어나는 것을 징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49. 육체의 고생보다도 마음 고생이 더 심한 현대의 아버지들이기 때문에 그토록 40대에 죽는 아버지들이 많은 것이다.

143. 달빛이 내려와 소녀의 젖은 눈가를 어루만지자 반짝이는 눈물방울이 흘러 내렸다.

189 “오늘 밤은 달이 참 밝구먼, 하늘에 등불이 켜진 것 같아.”

192 밤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들은 속삭이고 있는 듯했어요. 보리 이삭 스치는 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바다 물결 소리 같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