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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아홉살의 여름, 모 여대의 수시 면접을 보던 날이었다.

영문 지문을 해석하고 우리말로 그에 대한 답변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질문은 ‘민주적인 것democratic’의 정의는 무엇이며 우리 역사에서 그렇지 못했던 예를 찾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분명 그날의 면접은 그 어떤 전형보다도 합격의 당락을 갈랐다고 생각한다. 한동안 면접에 대한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나는 그 당시에 적어도 호모 아카데미쿠스(공부하는 사람), 호모 메모리스(기억하는 사람)였을망정, 호모 히스토리쿠스는 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긴 우리의 역사에서 고작 몇 십년 내의 두 사람의 대통령만 떠올렸다는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미련으로 남았다.

그 때 내가 하고 싶었던 ‘멋진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면접관을 감동시킬 만큼 설득력있고 매력적인 답변은 무엇이었을까. 가끔 역사 관련 서적을 볼 때마다 생각해 보곤 한다. 면접장을 나서며 머리를 탁 치고 ‘아, 그 말을 했었다면’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일요일 밤 10시 무렵. 습관처럼 10년이 넘도록 빼놓지 않고 보는 프로그램은 ‘개그콘서트’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 채널을 돌리다보면 시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역사저널 그날>이었다. 처음 몇 번은 채널을 옮겨가다가 잠시 시선을 주던 것에서 조금 더 관심을 두고 본 것은 EBS 스타강사 최태성이 패널로 참여하기 시작한 후였다.

‘그날’...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괜히 묵직하고 웅장하고 지면 아래로 침잠해 내려가는 무게감에 역사는 현실이 아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역사가 어제도 겪었고, 오늘도 지내고 있으며, 내일도 만나게 될 ‘그날’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서른이 다 되어 들은 최태성 강사의 EBS 한국사 강의를 듣고 나서였다. 역사라는 것, 특히 우리 역사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후세’를 살아가는 일인으로서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정치 및 역사 관련 팟캐스트를 청취하면서 학창시절 미처 다 배우지도 못했던 우리의 현대사를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그러는 사이 특히 가장 많이 공부했던 중세와 근세사에 대해서는 잘못 알고 있거나 잊어버린 것들이 많아진 것 같았다. 사극도 퓨전사극이나 상상력이 가미된 사극들이 많아 정통한 역사를 접할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저널 그날>은 사극 이외에 역사와 관련된 교양 프로그램 가운데 전에 없이 신선하고 풍부하게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역사저널 그날>의 3권은 연산군에서 선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대장금>, <장희빈>, <장녹수>, <왕의 남자>, <간신>, <역린>, <광해>, <관상> 등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만든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대체로 주인공이 되는 한 인물의 ‘영웅적 면모’보다도 ‘인간적 면모’를 그리게 될 때가 많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를 은유적으로 담아낸 것 같은 시대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시작은 연산군이다. 그가 조선을 호령하다 세상을 뜬 것은 지금의 내 나이인 31살 때였다. 사극 영화의 단골로 등장하는 시대 ‘종’과 ‘조’가 반복되는 왕조에서 ‘-군’을 달고 등장한 인물. 큰 흐름에서가 아니라, 그날 그 곳에 있었던 사람들, 일어났던 사건에 집중을 하다보면 3권의 가장 처음에 위치한 연산군의 이야기가 왜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국의 왕이자 그 시대를 살아간 남자로 그 어떤 극보다 더 극적으로 살아간 짧고 굴곡진 인생을 쭉 보다보니 비판적인 시각과 안타까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P. 23

정치적 암흑기에 지식인들이 항상 이런 고민들을 하죠. 김처선처럼 직언하다 죽을 것이냐, 아니면 김자원처럼 살아남아서 나중에 어떤 일을 도모할 것이냐? 만약 그런 입장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사간원 말단으로서 우두머리를 교체해야 한다고 말한 조광조와 중종의 이야기는 지금의 언론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기레기’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만큼, 세계 언론 자유도는 60위를 밑돌 만큼 신뢰를 얻지 못하는 우리의 언론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누가 있는지... 끝내 주변의 시기와 정쟁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것처럼 여전히 그런 사례가 있는 것을 보며 ‘역사는 흘러서 다시 돌아 오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평가가 거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지 않은 왕 중종뿐만 아니라 모두가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일면만을 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송강 정철, 그런가하면 왕이나 비, 신하가 아닌 ‘도적’으로서 이름을 떨친 임꺽정의 이야기는 훨씬 흥미로웠다.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공식적인 기록 가운데 하나인 <명종실록>에서 사관이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는 것이 대단히 놀라웠다. 아울러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인물을 시작으로 당시의 토지제도와 백성들의 분노를 키운 조세, 병역 제도를 함께 고찰하는 등 종과 횡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p.79

지금 나라가 선정을 펴지 않고 교화가 밝지 않으며, 재상이 욕심을 멋대로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손발을 둘 곳이 없으며 하소연할 곳도 없다. 가뭄과 추위가 절박해 하루도 버티기 어려워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도적이 되었으니, 그들을 도적으로 만든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영화감독, 연출가, 시인, 대학교수와 중등학교 교사, 방송인 등 다양한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각자의 관점에서 ‘요즘으로 친다면’, ‘지금에 비유한다면’과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과거로서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날’이고 또 다른 언젠가 ‘그날’이 되어 가는 모습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게 해 주는 제목이자 구성이 아니었나 싶다.

-p. 75

중종의 입장에서 한마디한다면...?

이해영(감독): 나는 예민한 무게중심점을 마침내 찾아내었다.

류근(시인): 나는 맹수들로 가득 찬 사파리에 장기근속한 조련사였다.

송웅섭: 나는 생계형 국왕이었다.

학생들에게 희곡문학을 가르칠 때, 먼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연극이나 영화가 상영물로서 결과를 만들려고 하지만 그 시작은 희곡과 시나리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작품을 글로 먼저 읽히곤 한다. 지문과 촬영, 조명이 어떻게 쓰이는지 글로 읽고 작품을 보면 영화를 보는 안목이 훌쩍 크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날>의 경우 방송이 먼저 나왔고 책이 뒤를 따라 나왔지만 방송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책을 먼저 권하고 싶다. 문맥을 충분히 읽어낸 후 관련 자료를 더 자세히 참고하고 싶을 때 영상 다시보기를 통해 도움을 받고 나면 훨씬 더 많은 행간의 의미를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다. 이미 대본으로 기획된 것을 책으로 옮긴 것이어선지 문장이 매끄럽고 잘 읽히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출판 및 기획자 입장에서 ‘주’를 책 아래 할 것인지 뒤쪽으로 뺄 것인지 고민을 했을 것 같은데 어떤 사실보다는 그 당시 쓰이던 단어나 인물 정보가 많아 바로 밑이나 단어 옆으로 주해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은 수 백, 수 천의 인물과 사건, 정치와 사회, 경제와 문화를 함께 이해하는 것은 사실 평생을 두고 계속되어야 하는 공부라고 생각하지만, ‘역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들이 실은 지금 내 앞에서도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까지는 개인적인 경험의 축적과 함께 내적인 성장이 동반되어야 가능해 지는 것 같다. 많은 책들이 나이가 들어 보면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다고 하지만 특히 이 책은 내가 한 세대를 살고 또 다른 세대를 살아갈 때쯤 더 큰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다시 한 번 10년도 더 된 면접장으로 돌아가 본다. 같은 질문지를 읽고 멋진 답을 만들어 본다. 연산군의 이야기를 넣을 수도 있고, 조광조의 이야기를 넣을 수도 있으며, 100년 정도의 조선 중기만 보더라도 풍부한 사람과 사건을 불러내 올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 ‘그날’이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를 통해 가까운 어제부터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내다보는 역사적 안목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단조로웠던 일상에 흥미롭지만 가상이 아닌 이야기 보따리가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