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에세이집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한국 제목: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의 첫 장을 펼치면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젊은 시절, 그대가 파리에서 살아보는 행운을 누렸다면 그 후 세상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파리는 이동하는 축제처럼 남은 생 동안 그대 곁에 머물게 되리라.' (p.150)

 요즘 영국드라마 <셜록> 시리즈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셜록 홈즈> 원작이 주는 탐정 수사물 이라는 특징 말고도 ‘잘생김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별명이 붙은 ‘베네틱트 컴버베치’와 영화 <호빗>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마틴 프리먼과의 케미가 큰 볼거리다. 그리고 런던 곳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 여행객들에게는 진한 추억을 상기하게 하는 의미도 있다. 런던 여행 사진을 찾아보다가 드라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셜록의 집이 있는 곳이자 실제로 셜록 홈즈 박물관이 위치해 있기도 한 베이커스트리트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신기해 했는지 모른다.

 문득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해외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그 도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서 관광객을 저절로 모여들게 하는 것이 문화와 관광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이 되는 것 같다고. 한편 우리나라 드라마는 마치 한 영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아도 따져보면 섭외된 장소가 전국에 흩어져 있거나 드라마를 위해 한적한 공간에 거대한 세트를 지어 놓고 관광지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아 해외 팬들이 한국에 왔을 때 당황스러워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오래된 것이라면 뭐든 신줏단지처럼 다루는 나라다. 박물관에 쌓인 유물과 건축물, 책, 그림, 와인...... 심지어 여자도 나이를 먹을수록 퇴물로 보는 대신 성숙미가 쌓여 더 멋지다고 생각할 정도다. (p.20)

 파리는 집착스럽게 옛것을 보존하고 미감을 사랑하여 주거 공간 하나를 수리하는 데에도 시의 허가가 필요한 곳이라고 한다. 많은 나라들이 다리나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모습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데 선진국이나 후진국, GDP 수준을 떠나서 그 땅의 과거와 역사의 가치를 존중하고 보존하는 데 힘을 쏟는 나라들이 더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인다.

2. 낭만에 대하여

사실 여기 와서 살아보니까 정말 이곳이 그렇게 낭만적인 도시인지 잘 모르겠어.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은 늘 불평불만을 터뜨리고, 날씨도 우울한 데다 사람을 너무 고독하게 만들어, 이 도시는.......”

바로 그거야. 그래서 낭만적인 거야. 동화처럼 해피엔딩이거나 놀이동산처럼 모든 게 예쁘고 완벽하게 짜여 있다면 그 안에 어떤 낭만이 존재할 수 있겠니? 보이지 않는 슬픔이 녹아있기 때문에 이 도시가 낭만적인 거야. 그게 바로 파리의 매력이지.” (p.211)

 로망. 내가 직접 보고 밟고 경험하고 느끼기 전까지 파리는 공기마저도, 쎈 강 물소리나 해가 지는 빛깔마저도 환상적일 것 같았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하기도 하고, 불친절한 프랑스 사람들, 에펠탑과 같은 전세계가 사랑하는 랜드마크에서의 파리지앵들은 사실 관광객들의 ‘도떼기 시장’에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더라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하는 마음마저 로망이 되는 곳이었다.

 처음에 손미나가 부러웠던 것은 일단, 그곳이 '빠리'였고, 새로 얻은 집은 에펠탑 앞이었으며, 집 주변엔 크르와상과 바게트 샌드위치가 맛있는 파리 시내 최고의 브랑제리가 있다는 것쯤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서서히 조금 다른 것들에 로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녀를 고스란히 닮은 글로 표현할 줄 아는 이 멋진 '언니'가 부러웠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 방송인이라서 생기는 단순한 부러움보다 친한 언니처럼 닮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느낀 자연스러운 모습들, 밝고 천진난만한 면과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열정,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배우려는 마음들이 글 속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쩜 그렇게 정다운 가족, 지혜로운 멘토 같은 이들 뿐일까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행운처럼 느껴졌던 것도 이내 손미나의 매력, 딱딱하고 차가운 파리지앵들마저 녹여버린 그 무언가가 있다는 꽤 근거 있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식이 없고 진심이 담긴 태도가 온전히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것 같다.

 프랑스, 파리 여행서는 처음이라 비교를 하기는 어렵지만 영국 여행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다양한 유형의 여행서적과 여러 작가들의 여행 에세이들과 견준다면 이 책의 강점은 꽤 분명하다. 그 어떤 책보다 다채로운 비유다. 파리의 바람, 공기, 햇볕, 우중충한 날씨마저도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표현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오물조물 맛있게 씹어 먹는 과일맛 젤리처럼 맛깔나게 쓰인 설명들이 개성적이면서도 동시에 누구나 실감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이었다. 조금 길게 인용해 보겠다. 

계절이 바뀌어 어느새 여름이 되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우울증 환자인 양 축 처져 있던 도시에 비로소 생기와 싱그러움이 넘쳐흘렀다. 필터를 바꿔 낀 듯 더욱 선명한 빛을 띤 세상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후기 인상파 화가의 그림 속 색채 같은 강렬함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센 강은 다이아몬드를 갈아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였고 태양은 밤 열 시가 되도록 그 위에서 출렁겨렸다. 여자들은 어깨를 드러낸 원피스를 입고 치맛단을 나풀거리며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고, 노천카페에는 코가 벌겋도록 열렬한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이 부쩍 늘었다. 거리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도 한층 경쾌해져서, 도시는 그야말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p.75)

 아나운서 출신의 유명 방송인이 내는 책이라는 생각보다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의 글이라는 생각 이 먼저 들었다. 어떤 표현들은 정말 매력적이어서 따로 필사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글을 읽은 후로 나는 같은 표현도 조금 더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건조하고 딱딱한 내 글에 향기와 숨, 움직임을 넣고 싶었다.

3. 아껴 읽고 싶은 책

 다 읽는 데에 2달이 넘게 걸렸다. 느리게 읽히는 책들이 더러 있지만 이 책을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 이유는 좀 다른 것이었다. 그저 아껴 읽고 싶었다.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면서, 자주 가는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읽었던 순간들도 떠오르지만 제주도 바닷가에 앉아서 넓게 트인 파란 바다를 전경에 두고 파도를 발밑에 두고 햇볕은 덤으로 쬐고 읽는 파리 이야기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유쾌했고 따뜻했다. 대부분은 매일 자기 전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 때까지 읽었는데 덕분에 꿈나라로 가기 전엔 늘 그녀의 실감나는 비유로 채색된 파리를 상상했다. 그 기분 좋은 상상이 끊어지는 게 싫었던 것이다. 꽂아놓은 책갈피 뒤로 여전히 많은 페이지가 남아 있다는 게 조급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책의 서문에서 파리로 떠나게 된 배경에 그녀의 개인사적인 아픔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하고 쿨하게 보였던 그녀에게도 다 내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 있었다는 것에 조금은 놀랐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와 나를 빨리, 강하게 이어주는 끈이 되어 주었다. 여전히 ‘일반인’들은 꿈만 꾸거나 꿈도 꾸지 못할 파리지앵으로서의 삶, 파리에서 작가로 글을 구상하며 쓰며 사는 삶이지만 현지인처럼 여행하기, 도시에 물들기, 사람과 만나고 나누기, 떠나고 휴식하기, 아름다움과 인생에 대하여, 창작의 고통까지 파리 그 이상의 무엇들을 가득 담은 알찬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