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가끔 예기치 않은 상황, 장소에서 예기치 않은 행운을 만날 때가 있다. 책꽂이에 꽂아둔 오래된 책안에서 빠릿빠릿한 지폐를 발견하곤 환호성을 질렀을 때처럼 그런 행운은 삶의 작은 활력소가 되거나 때론 뚜렷한 터닝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그날도 그랬다. 유난히 봄을 많이 타는 체질인 나는 4월만 되면 유독 무기력증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고질병이 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던 시인이 아직도 살아있다면 진한 포옹이라도 해 주고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4월만 되면 정신도, 육체도 물에 젖은 솜마냥 제 구실을 못하고 그러니 되는 일이 있을 턱이 없다. 땅속으로 꺼질 것만 같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광화문 근처로 볼일 보러 나갔다가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치는 못하는 심정으로 근처 서점에 들렀다. 평소 책구매는 인터넷을 자주 이용하지만 사람들로 붐비는 서점의 생동감이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코너별로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이던 내 눈에 한권의 책이 들어왔다. 20대에 꼭 만나야 할 50인. 자기계발 서적들이 넘쳐나는 그 곳에 파릇한 신간으로 자리한 그 책으로 무심결에 손이 갔다. 옆으로 흘깃 눈을 돌리니 대학생 쯤으로 보이는 몇 명의 여자들이 내가 집은 책을 서서 읽고 있었다. 20대.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오래된 감성이었지만 언제나 20대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마도 그런 소박한 감성이 나를 자극했을 것이다. 평소 자주 가던 소설코너가 아니라 자기계발 코너로 내 발길이 움직이고 머물렀던 이유는. 그렇게 시작된 책읽기는 한달음에 마지막 문장까지 달음질쳤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충만감이 밀려와 가슴이 벅차 올랐다. 혼자 읽기에 아까운 생각이 들어 아는 동생들을 위해 몇 권을 샀고, 며칠 후 개인 소장용으로 인터파크에서 한권을 새로 구입했다. 인생의 후반기를 준비하며 하프타임에 접어든 내가 어디서 그런 신선한 배짱으로 안하던 짓을 덜컥 질러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좋다. 그날 이후 매년 한계로 느껴왔던 4월의 문턱을 거뜬히 뛰어 넘고도 남을 힘을 비축하게 됐으니까.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20대에 진 빚이 많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20대에 좀 더 불꽃같은 열정으로 살았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를 많이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20대의 혈기를 왕성히 즐기며 살았던 것도 아니다. 또 그렇다고 어영부영 살았던 것 같지도 않다. 나름대로는 노력했고 남들하는 만큼 자아실현에 투자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인데 왜 지금의 나는 이렇게 그 시절을 아쉬워하며 피눈물로 후회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아마도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 진정으로 내가 원했던 삶을 살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지혜롭게 반전시키지 못해 스스로 무덤을 팠던 자책 때문인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서른세살의 나이에 회사를 뛰쳐나와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나는 그렇게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20대의 찬란한 태양을 등에 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스무살의 나이에 경험한 첫사랑의 실패와 좌절, 엄하기만 하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나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내몰았고 결국 일도, 사랑도, 가족도, 기억 속의 20대는 온통 그늘진 아픔 뿐이었다.

이 책, [20대에 꼭 만나야 할 50인]은 비단 20대에게만 한정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목에 ’20대’라고 못 박은 것이 오히려 아쉬울 정도였는데, 인생의 어느 순간에 서서 막막한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저자가 소개하는 50명의 사람들은 큰 성공을 거둔 유명인이 아니었다. 지난해 [똥파리]라는 영화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양익준 감독 정도가 기억에 남는 사람일 정도로 저자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서 불꽃같은 열정과 가치를 뽑아내고 있었다. 대개 자기계발 서적들을 보면 개인의 성공공식을 너무나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이 책은 저자의 섬세한 관찰과 통찰을 통해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 끌렸다. 또한 학교와 직장일을 병행하며 저자가 겪었던 절망과 희망의 시간을 담담하게 풀어내면서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어 저자가 소개하는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감정적으로 동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0대의 어두운 터널을 힘겹게 통과했지만 여전히 나는 미숙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40대를 맞았다. 30대의 나날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40대는 후반기를 준비하는 하프타임이 되리라. 가진 것 없고, 이뤄 놓은 것 없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꿈을 부여잡고 있지만 그래도 꿈이 있어 아직은 버틸만 하다. 주류의 세계가 애당초 맞지 않았던 나는 비주류의 모습으로라도 행복할 수 있기를 매일 꿈꾸며 노력한다. 아마도 20대의 나는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갈 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흔히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때가 30대라고 한다. 30대의 나는 그 화려함을 조금은 만끽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40대에 이르고보니 40대는 또 그 나름의 세련미가 있어 좋다. 그렇게 나를 가두고 암울하게 했던 사랑의 상실감도 40대가 되니 유유히 흘려보낼 여유도 생겼다. 다만, 계절의 순환에 심한 앓이를 해야하는 고질병이 유독 나이를 실감하게 했는데 역시 벼랑끝에 내몰릴 땐 서점을 찾으라던 저자의 주장은 맞는 말이었다. 서점에서 이런 행운을 만나게 될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20대에 빚을 졌다는 자책으로 허무감에 빠지는 날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떨쳐내지 못한 첫사랑의 아픔으로 새로운 사랑에 마음을 닫은 채 목석처럼 부유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더욱 효과있는 사랑의 묘약을 처방해 줄 것이다. 가족에 대한 상처로 인해 성장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심장에 키높이 깔창을 선물받거나 느닷없이 성장호르몬을 맞은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열심히 아름답게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현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시간과 세월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잠시 잊었던 내 삶의 이유를 깨달았다. 회사를 그만두면서까지 내가 찾고 싶어했던 진정한 나의 모습을 다시금 확인했다. 저자는 말한다. 지금 움직이라고. 실천하지 않고 꿈을 이룰 수는 없다고. 너무나 당연한 그 말이 산란하게 요동치던 가슴에 부표처럼 선명하게 자리를 잡는다. 아직 배울 게 많다는 건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많다는 증거이겠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책상 앞 메모보드엔 이런 글귀가 또록또록하게 적혀 있었다.

"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글을 쓰는 것이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돌 위에 새기는 것이다."
- 대만의 세계적인 거장 허우 샤오시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