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지치고 건조한 일상에서 재회한 모리 슈워츠.

 

“세상이 멈춰져야 되는 게 아닌가? 저 사람들은 내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나 있을까? 하지만 세상은 멈추지 않았으며 아무 일 없는 듯 잘도 돌아갔다. 선생님은 힘없이 차문을 열면서 나락 속으로 추락하는 느낌을 맛봤다.” (p.21)

 

아침 7시. 알람으로 맞춰놓은 TV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스로 켜진다. TV소리에 자동으로 눈이 떠진 나는 잠시 잠이 덜 깬 게슴츠레한 눈으로 TV화면을 응시한다. 어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사건사고들이 앵커의 입을 통해 공중으로 흩어진다. 내일부턴 켜지는 시각 볼륨을 낮춰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아마 TV는 내일도 같은 볼륨높이로 자신의 존재를 알릴 것이다. 벌써 몇 달 째 아침마다 이런 결심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저마다의 일상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몇 년 째 이혼을 입에 달고 사는 친구, 각종 건강식품과 다이어트 제품을 꿰고 있는 친구, 세상 고민이란 고민은 혼자 다 짊어진 듯 찌그러져 있는 친구. 그들 중에 애써 평온한 척 젠체하고 앉아있는 나.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것처럼 보이나 모두들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어 우리의 수다는 늘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격한 감정으로 서로의 상처를 후벼 파면서 그 찰나의 짜릿함을 즐기기도 했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를 별 의미 없이 지내던 어느 날,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묵혀두었던 집안 대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기로 침대 밑을 휘젓던 내 손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있어 낑낑거리며 꺼내보니 먼지를 옴팡 뒤집어 쓴 책 한권이 나왔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여기에 있었구나. 근데 왜 책꽂이가 아니라 여기에...? 먼지를 털어내며 표지를 살며시 넘겨보는데 첫 페이지 여백에 익숙한 내 필체로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나는 모리를 수요일에 만났고 그와의 만남이 작은 축복이었음을 고백한다. 죽는다는 것이 쓸모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님을 몸소 증명해 주고 가신 모리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2003년 10월1일 수요일 맑음.

모리 슈워츠가 내 무미건조한 일상의 문을 다시 두드려주다니 믿기지 않았다. 첫 번째 만남 이후 6년 6개월만의 재회였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만남에서 난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달았고 앞으로 내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에 찬 기대를 걸었었다. 하지만 6년여가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자아의 독립과 성장보다는 세상의 논리와 문화에 의지해 살고 있는 유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이젠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짧은 순간 탄식 같은 한숨을 내 뱉는 나를 향해 모리는 인자한 미소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보게, 친구. 인생에 너무 늦은 때란 없어. 내 마지막 수업에 동행해 줄 텐가?”

Ⅱ. 삶과 나이 듦, 죽음, 소유, 베풂, 용서, 관계에 대하여.

 

“내 말을 믿으라구. 죽어가고 있을 때는 사람은 모두 같다는 게 참말임을 알게 되네. 우리 모두 똑같이 시작하지. 출생으로. 그리고 똑같이 끝나네. 죽음으로. 그런데 뭐가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거야?” (p.201)

 

나는 늘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죽음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죽음은 언제부턴가 나와 상관없는 것에서 나와 상관있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죽음. 아무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신비로움으로 남아있는 어떤 초월적인 것. 살아오면서 한 번도 죽음을 진심으로 찬미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이 듦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왠지 모리의 고백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죽음에 직면한 노교수의 거리낌 없는 고백은 해질녘의 겸허한 석양과도 같이 내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늘 나이 먹는 것에 맞서 싸우면 언제나 불행해. 어쨌거나 결국 나이는 먹고 마는 것이니까.” (p.156) “죽는 법을 배우게 되면 사는 법도 배우게 되지.” (p.112)

 

그의 논리는 늘 이렇듯 명쾌하고 여유가 있다. 내 나이를 이미 거쳤기에 그 시절이 어떤 기쁨과 눈물, 환희와 후회로 가득 차 있는지를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내가 만약 모리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 지금의 나를 과연 어떤 식으로 추억하게 될까? 분명한 건 모리처럼 삶에 있어 낙관적이고 나이 듦에 당당하고 죽음 앞에 솔직한 노년을 맞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리를 좀 더 젊었을 때 만났다는 건 내게 큰 행운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 사이에 큰 혼란이 일어나고 있네. 음식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초콜릿 아이스크림은 우리가 원하는 기호식품일 뿐이야. 자신에게 정직해야 하네. 최신형 스포츠카는 필요치 않아. 굉장히 큰 집도 필요 없고.” (P.164)

 

TV 홈쇼핑을 보다가 27인치 HD TV모니터가 따라오는 컴퓨터 패키지에 눈길이 갔다. 옳거니! 지금 쓰고 있는 컴퓨터가 낡고 오래돼 안 그래도 새 걸로 바꿀까 했는데 저걸로 해야겠다! 하지만 모리는 아직 더 쓸 수 있는데 왜 바꾸려 하느냐고 나무랐다. 난 결국 컴퓨터 교체를 좀 더 뒤로 미루기로 했다. 어릴 때의 인생 모토가 ‘새털처럼 가볍게 살자’였는데 난 언제부터인가 너무도 많은 것을 무겁게 쥐고, 안고, 이고, 메고 있었다.

“자기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 데 헌신해야 하네.” (p.65)

 

한때는 교회 청년공동체에서 봉사활동에 열심을 낸 적이 있었다. 큰 교회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봉사의 기회가 열려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기만족을 위해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괴감을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자기합리화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는 나로 인해 잠깐이나마 행복하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그 순간들로 인해 나를 둘러싼 세상이 조금은 풍요해지지 않았을까?

 

“자신을 용서하게. 그리고 타인을 용서하게. 시간을 끌지 말게, 미치. 누구나 나처럼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야. 누구나 다 이런 행운을 우리는 게 아니지.” (p.214)

 

나는 한번이라도 나를 쿨하게 용서해 본 적이 있었나? 나는 늘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그 덕분에 곧잘 자기연민에 빠졌다. 자기에게 엄격하면서 어떻게 타인에게 관대하길 바라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세상일에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내 시각을 신선하고 새롭다 느끼며 나르시시즘에 빠져있었다. 모리는 늘 무언가와 싸울 준비가 돼 있던 호전적인 나와 화해하고 끓어오르던 분노로 밤잠을 설쳤던 과거를 미련 없이 떨쳐내라고 말한다. 용서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매일 매일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으라고 한다.

 

Ⅲ. 책을 덮으며...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하리.

 

“사랑을 나눠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거야.” (p.75) “사랑이 이기지. 언제나 사랑이 이긴다네.” (p.61)

 

이제 모리와의 재회를 마무리해야할 시점이 온 것 같다. 결국 마지막 수업에서 모리가 일깨우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된다는 것을 책을 덮으며 깨달았다.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불살라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온 몸으로 알리고 간 모리 선생님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모리가 죽은 지 15년이 넘었지만 그가 가르쳐 준 인간에 대한 따듯한 배려와 사랑은 더욱더 선명한 빛으로 살아있는 듯하다. 동력을 상실한 내 삶에 불현듯 찾아와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잠든 육신을 깨운 것처럼 말이다.

 

나는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각오나 맹세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었고 최고로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분 좋은 추억들만 주억거려 보았다. 의외로 좋았던 기억이 많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이만하면 잘 살아 온 것 아닌가요, 모리선생님? 모리는 예의 그 인자한 미소만 띤 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모리가 생을 갈음할 묘비명을 직접 결정했듯이 나 또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의 생을 한 문장에 담아놓고 산뜻하게 떠난 모리 선생님처럼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묘비에 뭐라고 적으면 좋은지 결정했네. 마지막까지 스승이었던 이.”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