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아무도 모르는, 혹은 아무도 알려하지 않는 진실 그 사이에서.

- 김중혁의 [F1/B1]과 이장욱의 [변희봉]을 읽고.

착한 가격에 충동구매를 하다.

구독해 보는 시사주간지 한 귀퉁이에서 한창 떠오르는 작가들의 작품을 묶은 책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발견했다. 이름하여 [2010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역시나 출판사는 신진작가를 꾸준히 발굴하고 키워온 ‘문학동네’였다. ‘작품들을 한 성향으로 묶어낼 수 없는 다양성의 발견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기쁨이다’라고 쓴 신경숙 작가의 추천사가 구미를 당겼다. ‘특별 보급가 5천5백 원’이라는 마지막 줄에 주저 없이 인터넷서점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착하고 바람직한(!) 가격이지 않은가. 책을 받아보니 가격만큼이나 디자인도 상큼하고 가벼웠다.

[2010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에는 지난해 발표된 단편소설 가운데 2000년 이후 등단한 작가의 작품 중, 젊은 평론가들로 구성된 선고위원회와 중견작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의 엄정한 심사를 거친 7편의 작품이 수록돼 있다. 대상인 김중혁의 [F1/B1]을 비롯해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 이장욱의 [변희봉]등, 열정과 패기로 충만한 7편의 소설은 젊음과 참신함을 앞세워 독자를 소설의 신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7편의 소설이 모두 개성 만발한 작품이었지만 나는 그 중 김중혁의 [F1/B1]과 이장욱의 [변희봉]을 인상 깊게 읽었다.

김중혁은 소설이전에 ‘씨네21’의 고정 칼럼을 통해 익히 친숙해진 작가이다. 잡설로 시작해 잡설로 끝나는 김중혁 특유의 시시껄렁한 농담 같은 영화 평론은 꽤 인기가 있어 제법 많은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아무런 허세도 없이, 솔직담백하게 에두르지 않는 그의 직설화법이 [F1/B1]에도 고스란히 살아있어 반가웠다. 그의 글은 늘 이렇게 얼렁뚱땅 여유를 부리는 것만 같다. ‘자, 준비되셨습니까? 지금부터 시작합니다.’라고 말이다. 이장욱이라는 소설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감초 명배우 변희봉과 이름이 같은 제목이 우선 눈길을 끌었지만 능청떠는 솜씨가 김중혁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쾌하게 몰아치다가 마지막엔 쓸쓸한 ‘이장욱 스타일’의 문체에 매료되었다. 이 책에서 건진 가장 큰 수확이었다.

[F1/B1], 아무도 모르는 진실에 대하여.

[F1/B1]과 [변희봉]은 둘 다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자는 아무도 모르는 진실에 대해, 후자는 아무도 알려 하지 않는 진실에 대해. [F1/B1]에는 ‘건물관리자연합’이라는 정체불명의 권력집단이 등장한다. 그들은 고평시의 네오타운 지하에 50개의 건물을 연결한 가공할만한 조직을 이루고 건물 내의 모든 것을 통제하지만 그들의 정체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지배당하면서도 입주자 중 아무도 그들의 독재를 눈치 채는 이가 없었다니. 관계의 그물망이 온오프로 빈틈없이 얽혀있는 현실에서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어떤 의미에서 네오타운은 떠도는 섬처럼 필연과 우연 사이를 방황하는 고독한 인간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 어느 날 그들만의 낙원으로 영원할 것 같았던 건물관리자연합의 우두머리 구현성과 그의 하수인 이문조의 권력에 대항하는 ‘암흑 속의 전투’가 발발한다. 암흑을 틈 타 건물에 침투한 특공직원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은 윤정우와 조천웅은 난투극 끝에 특공직원 일곱 명을 붙잡아 경찰에 넘기지만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사건은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진다. 아무도 전투의 배후에 구현성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진실은 네오타운의 퇴락과 함께 묻혀버린다.

여기서 질문 하나.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던들 입주자들의 삶은 달라졌을까? 구현성이 사라지고 건물관리자연합회가 공식해체됐지만 그들은 여전히 지하에 터를 잡고 조직을 지탱하고 있다. 입주자들은 이전과 전혀 다름없이 건물관리자의 보호(?)아래 불편한 동거를 계속한다. 윤정우는 지하관리실의 모든 통로를 하나로 연결시켜준 구현성에게 고마움까지 느낀다. 이것이 진실이다. 무서운 일이지만 윤정우가, 독자가 알고 있는 진실의 전말이다. 층과 층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슬래시(/)처럼 계층과 계층사이에는 아무도 모르는 허위의 기호가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조천웅의 표현대로 그냥 표시일 뿐이지만 아무 데나 죽죽 그어 놓으면 큰 일 나는.

[변희봉], 아무도 알려하지 않는 진실에 대하여.

아내에게 이혼 당한 만기는 어느 날 갑자기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연극배우로 전업한다. 그는 배우 중의 배우, 봉준호 감독이 사랑한 배우 변희봉을 만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 아니, 아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다. 그들에 의하면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와 [괴물]에 나온 사람도 변희봉이 아니라 성격파배우 장항성과 김인문이란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만기는 급기야 인터넷을 두드려 확인해 보지만 그 어디에도 변희봉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만기가 기억하고 있는 변희봉이라는 배우, 70년대 성우로 데뷔해 연기를 시작했고 드라마와 영화에서 주로 조연을 맡다가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배우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만년에 만개한 배우, 어떤 역을 맡더라도 그만의 캐릭터로 만들어내는 개성적인 연기가 특징인 배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만기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현실과 환상사이에서 혼란을 겪던 만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임종직전의 아버지를 통해 변희봉의 존재를 확인하고 해방감을 맛본다. 아무도 만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변희봉이라는 진실은 만기의 마음에 신념으로 피어나 그를 지탱하는 삶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진실의 힘은 위대하지만 타인에게 진실을 이해시키기란 이렇듯 고독하고 힘겨운 과정임을 만기의 입장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김중혁의 진실, 이장욱의 진실, 그 사이에서.

김중혁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정치적이고 집단적이다. 반면 이장욱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일상적이고 개인적이다. 전자의 진실은 몰라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다. 권력을 쥔 사람은 진실의 이런 점을 잘 이용해 국민위에 군림한다. 후자의 진실은 개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러기에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사람은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미친 사람으로 정신병원에 감금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 짧은 소견을 밝히자면(어차피 여기까지 써온 글이 모두 개인적 소견이지만) 김중혁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김중혁만의 독특한 상상력이 빚어낸 [F1/B1]은 일면 SF소설 같은 빠른 전개로 강한 흡인력을 자랑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정석적으로 흘러간다. 계단으로 상징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재개발과 부동산으로 상징되는 천민자본주의, 진실을 외면하고 덮으려는 공권력(경찰),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농락당하는 민중들(입주민들) 등, 김중혁은 풍성한 알레고리로 은폐된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결국 그의 귀결은 허무한 ‘망각’으로 이어진다. 마치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허무한 결말이 주는 이율배반이 이 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상으로 허접한 감상문을 끝낸다. 얕은 지식으로 두 작품의 심연까지 들여다본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평범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글쓴이의 의도를 상상해보는 것도 무척 의미 있었다. 아, 첫 단락에서 이 책의 가격이 너무 착하고 바람직하다고 적었지만 그 말은 아무래도 수정해야 되겠다. 한국문학의 미래를 짊어질 작가들의 작품이기에 더욱 값어치가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도 값싸게 좋은 작품을 감상했다는 미안함이 들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금맥을 발견한 기쁨, 게다가 꽤 괜찮은 상금이 걸려 있는 리뷰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미안함 위에 감사함까지 더해져 송구스럽다. 가슴 뛰는 젊은 문학축제의 첫 장을 성공적으로 열었으니 제2회, 제3회.... 무궁무진하게 발전하는 <젊은 작가상>이 되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