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5호선 지하철 안이었다. 나는 운 좋게 자리에 앉아 있었고 사람들은 꾸역꾸역 빈 구석을 찾아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지하철은 어느새 만원을 이뤘다. 나는 1억원 고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임영태 작가의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을 펼쳐 들고 있었다. 며칠동안 계속 손에 잡고 있었는데도 별반 진도가 나가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꽤 많은 페이지가 쉭숙 넘어갔다. 230페이지였다. 하나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공의 죽은 아내가 썼다는 '빛은'이라는 제목의 시.

 

빛은 

조금이었어

 

아주

조금이었지 

 

그래도 그게 빛이었거든

 

 찌징.... 어떤 징한 자극이 심장을 거쳐 눈물샘으로 모여들었다. 어느새 두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이 볼까봐 부끄러웠다. 다행히 모자를 쓰고 있었다. 캡모자의 좁은 챙이나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독서를 한 탓에 이름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가 기른 개의 이름이 태인이었다는 사실에서 이름에 태나 인이 들어가는 사람일 것이라는 짐작을 할 뿐이다. 하지만 궁금하지가 않았다. 그의 느린 걸음을 따라 동교동, 서교동, 연남동을 걷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홍대입구역에 갈 일이 많았다. 매번 그의 사무실이 그 근처라는 자각을 하곤했다. 속독을 하는 버릇이 있지만 나는 그와의 데이트를 즐기며 연애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그래서 자연 속도는 늦었고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는 선득한 외로움이 밀려와 며칠전 버스 안에서 우연히 들었던 이선희의 '소녀의 기도'를 들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이방인에게 서울은 쓸쓸한 도시다. 하지만 이방인이기에 서울의 이면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서울은 내게 뿌리내리지 못한 욕망 같은 곳이다.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미리 포기해 버린 짝사랑 같은 것이다. 남자는 대필로 근근히 목구멍에 풀칠하는 제3의 작가다. 그에게는 별다른 욕망도 분노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짓는 특징이 욕망의 유무라고 하는데 어쩌면 그 남자의 정체는 유령인지도 모른다. 이승에 남겨둔 미련의 길을 따라 이곳저곳 배회하는 귀신. 어쩌면 내가 책 속에서 만난 그 남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책을 손에서 놓는 순간 그런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나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처럼 연애를 했다. 그의 상처와 나의 고독을 주거니 받거니 아면서.

 

  용서하고 싶었다. 가장 힘찬 용서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챊아요, 아무 걱정마요... 남자의 흐느낌이 가득하다. 이럴 때 나는 어떡해야 좋을까. 북받치는 감정에 나도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울고나니 아침이었다. 찬란한 빛이 방안을 따뜻하게 돌아다녔다. 문득 햇빛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란 살아볼 만한 것이라던 그 남자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어버렸다.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