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안동에 난생 처음 가 보았다. 중앙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멀어서 못갔고, 최근에는 와이프가 바다가 좋다고 하여 동해안에 자주 가느라 못 갔고, 이제 처음 가게 되었다. 인터넷으로 보니,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농암 이현보’의 고택에서 숙박을 할 수 있게 해 놓았길래 딸내미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리란 생각에 지체없이 그곳으로 숙박을 정해 놓고, 드디어 며칠 전 몸살기운을 무시한 채, 중앙고속도로를 탔다. 우리 가족은 아무리 고택이라고 해도 TV는 있겠지, 그럼 1박2일이나 보면서 뜨끈한 아랫목에서 셋이 모여 앉아 다음날 월요일에 쉰다는 사실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작가미상, 이현보 초상 (보물 제872호) 농암종택소유]

그러나 그곳에 TV는 없었다. 대신 사랑채에 왠 ’선조어필’이라는 표식이 있는 ’積善’이라는 큼지막한 글씨의 현판 비스무리한 것과 바둑판, 차를  마실 수 있는 도구 등만 덩그러니 있었으니 횡한 마음이 든다. 다음날 아침 그 집의 종손, 종부인 주인 내외 분과 다른 숙박객 5팀 정도가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방에는 오래된 듯한 첩으로 되어있는 고서화가 있었고, 그 집에서 나올 때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때때옷의 선비 농암 이현보’라는 전시회 때 발간된 화보집을 샀다. 그 내용을 나중에 자세히 보니 내가 봤던 선조어필과 그 고서화 전부 보물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소중한 유물이었다. 헉, 밥 먹으면서 봤던 그 서화첩이 보물이었다니. 평소에는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밖에 볼 수 없던 우리나라 보물들이라니. 내가 이를 밥 먹으면서 봤다니.... 집안 대대로 내려져 오는 5000여 점의 유물은 그 근방 무슨 문화원이라는 곳에 위탁 보관 되어있고 몇 점은 그 집에 그대로 놔둔 것이다. 최근 그런 도둑들이 많다고 하는데 괜챦은 건가?

평야지대가 많아 삶이 풍족했던 호남지방과는 다르게 영남지방에서는 그림이나 음악이 발달하지 않았고 대신 문장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또한, 한끼 식사에 상다리가 뿌러져라 차린 호남 스타일은 영남에서는 사치로 여겼다고한다. 그러한 비옥한 호남이 일제강점기에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수탈이 심했고 (일본인들이 호남 쪽 평야지대를 보고 침을 삼키며 갈취하고자 했을 법 하다. 이는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에 보면 생생하게 묘사된다.)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된 영남편중 개발의 피해자가 되었으니 확실히 역사는 돌고 도는가 보다.


선조가 농암집안에 내린 하사 문장이다. (농암종택)

공교롭게도 이 씨리즈, "김봉렬의 한국 건축 이야기"의 세 번째 권은 안동이 배경이 되는 곳이 많다. ’도산서당과 도산서원’, ’병산서원’ 그리고 ’안동의 재사들’이다. 이 중 도산서당/도산서원 그리고 병산서원을 방문하였다.

병산서원은 유성룡을 모신 서원이다. 안동에 오면 도산서원과 하회마을만을 보통 가게 되는데 병산서원을 방문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책 때문이다. 아침 일찍 가보니 조용하니 낙동강물을 바로 볼 수 있어 좋았다. 만대루에도 서 보고, 이 책에서 얘기 해 준대로, 훈장 자리에 앉아 만대루라는 사진프레임으로 낙동강을 바라보기도 했다. 설명을 해 주시는 어느 여성 도우미 분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사는 용인에 서원이 유독  많은데, 그 중 조광조를 모신 심곡서원이 제일이라한다. 가까운 데에 그런 곳이 있음을 이리 멀리 와서 듣게 되다니 아이러니하다.

도산서원을 가는 중에는 비가 보슬보슬 내렸는데, 그 앞에 있는 아름드리 고목들의 웅장함을 보니 빗 속을 걸어온 보람이 있다. 도산서당이 기존에 있고 나중에 퇴계선생을 모시느라 증축하여 도산서당이 생기게 되었다한다. 그래서 기존의 서당을 그대로 둔 채, 이를 확장하는 건축이 필요했고, 그러한 흔적이 잘 보인다고 이 책은 설명한다. 사실 나는 이곳에 갔다 온 뒤에 이 책을 읽었는데, 이미 차 안에서 이를 읽은 와이프가 각 건축물들을 보면서 읽었던 내용을 이야기 해 주니, 참으로 유식해 보였다. 책 하나 읽었을 뿐인데 유식해 보이다니.


담을 헐으면 문이 되나니...(와이프가 이 앞에서 이 말을 해서 적잖이 놀랐다. 허나 알고보니 책에 있는 내용)



[정선, 퇴우이선생진적첩 중 계상정거도 개인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위탁]

이 작품은 몇 달전 용산국립중앙박물관 겸재정선전에서 관람했던 그림이다. 어디서 본 그림같지 않은가? 그렇다. 1000원짜리 지폐 뒷면으로 쓰인 그림이다. 겸재 70대에 그린 작품인데, 도산서원이 되기 전 도산서당일 때의 풍광이다. 글 읽는 퇴계의 모습도 보인다. 강건너에서 도산서원쪽을 바라보면 이 풍광이 나오리라. 그리고 앞에 보이는 길이 우리 가족 세 식구가 입구에서 도산서원까지 비 맞으며 함께 걸었던 길이다. 시간의 흐름에도 그대로 흔적이 남아있는 이 길을 퇴계도 걸었으리라. 사실 이 작품은 보물로 지정이 되기는 했어도 진위논란이 있어왔다. 위작이라 할지라도 원본을 모사했다면, 진품에서 나오는 겸재 70대의 힘찬 필치는 느낄 수 없어도, 요즘의 지형과 비슷한 부분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반갑게 느껴진다. 아무튼 우리는 저 길을 걸은 거다. 그런데 화면 오른쪽에도 절벽을 둘러치는 길이 보이는데 내가 갔을 때도 저 길이 있었나?

일정의 한계때문에 이 책의 마지막에 소개된 ’안동의 재사들’을 방문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책을 읽고 그것의 배경이 되는 곳을 방문하는 가족여행 한번 어떠신지? 이 씨리즈는 건축과 건축물에 중점을 둔 책이기는하다. 하지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주는 책도 함께 미리 읽어둔다면 분명 느끼는 바가 다르다.

(쓰고 나니 이 글은 여행기도 아니고, 안동소개글도 아니고, 책리뷰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작품감상기도 아니니 일관되지 못한 내 글쓰기 스타일의 보잘것 없음이 다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