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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1

뭔가를 예감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다음날 등산을 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 뒤 부푼 기대에 가득 차 올려다보는 창밖의 달무리,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건만 똥이 마려운 것인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내게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면접관, 밤을 새가며 1주일 만에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과제를 모두 끝마친 뒤 제일 먼저 강의실에 도착해 잠시 책상에 기댄다는 게 한 시간이나 실컷 자고 나서 깨어나 바라보게 되는 핸드폰 액정의 시각. 둥근 달무리나 똥마려운 얼굴, 혹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 중간에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다.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결국 내가 이별에 대해서 말하게 되기까지 첫 번째 톱니바퀴의 역할을 한 건 도서관에 근무하던 한 자원봉사자의 부지런함 때문이었다. 항상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그 자원봉사자는 새로운 수서목록과 각종 공지사항을 붙여놓는 게시판 한 쪽이 늘 비어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다가 사서들의 동의를 얻어 A4용지에 매주 한 편의 시를 인쇄해 압정으로 꽂아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톱니바퀴 옆에 새로운 톱니바퀴가 물려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가을, 겨울, 봄, 이렇게 세 번의 계절이 지나간 뒤부터였다. 오월이 시작될 무렵, 그녀는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이사하기 위해서 일을 그만뒀고 얼마간 그 자리에는 나희덕의 시가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아마도 이러다가 ‘이 주(週)의 시’가 ‘이주(移住)의 시’로 읽히는 게 아닐까 염려했거나 진정한 의미의 자원봉사라는 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도서관 이용자 중의 한 사람이 신경림의 시를 그 자리에 붙여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도 앞 다퉈 이 나라에 좋은 시인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종이와 압정으로 보여주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게시판이 혼란스러워지자 누군가 그렇게 두서없이 시를 붙여놓을 게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게시판에 붙일 시를 선정해보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렇게 해서 시 윤독 모임 ‘함께 시를 읽는 사람들’, 그러니까 줄여서 함시사가 만들어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나로 말하자면, 좋아하는 시(최하림의 시였다)를 그 게시판에 붙인 세 번째 사람이었다. 미리 시를 골랐다기보다는 이런저런 시가 붙어 있는 게시판을 보고 즉흥적으로 노트에다가 만년필로 휘갈겨 쓴 것이었다. “여섯일곱 살 때 바다에는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로 시작해서 “우리가 늙어서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곳에는 저녁 그림자가 인간의 슬픔처럼 조용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로 끝나는 시였다. 그렇긴 하지만 그 제안에 동의한 사람들이 수요일마다 정기적으로 모여서 각자 골라온 시를 함께 읽은 뒤, 그 다음주에 게시판에 붙일 한 편의 시를 고르는 동안에도 모임에 가볼 생각 같은 건 전혀 해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월을 다 잡아먹을 듯 기세가 등등하던 장마도 완전히 끝나고 뜨겁고 뜨겁고 뜨겁기만 한 여름 햇살이 작열할 무렵, 책을 빌리러 갔다가 나는 게시판에 ‘세계의 끝 여자친구’란 시가 붙어 있는 걸 보게 됐다. 그 시에 따르면, 시인이 걸어가는 길의 끝에는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거기가 바로 세계의 끝이며 그 때 우리는 “불과 눈물이 서로 스미듯이, 혹은 달과 무지개가 그러하듯이” 나란히 메타세쿼이아 거친 둥치에 등을 기대고 앉게 될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사랑은 저처럼 뒤늦게/ 닿기만 하면, 닿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자욱도 없이// 삼월의 눈처럼”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 시와 그 시를 쓴 시인의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호수를 바라보며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라는 구절에 마음이 끌려 나는 도서관의 컴퓨터를 검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타세쿼이아, 살아 있는 화석>이라는 책을 찾아냈다. 내가 열람인들의 발길이 뜸한 식물학 코너에 꽂혀 있던, 아마도 아무도 대출한 적이 없어보이던 그 책을 빌려온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잎 지는 초저녁, 무덤들이 많은 산 속을 지나왔습니다. 어느 사이 나는 고개 숙여 걷고 있습니다. 흘러 들어온 하늘 일부는 맑아서 사람이 없는 산 속으로 빨려듭니다. 사람이 없는 산 속으로 물은 흐르고 흘러 고요의 바닥에서 나와 합류합니다. 몸이 훈훈해집니다. 아는 사람 하나 우연히 만나고 싶습니다.”

중년 남자 하나가 좀 겸연쩍다는 표정으로 시를 읽기 시작했다. 장마가 완전히 끝나고 뜨거운 낮의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던 어느 수요일 저녁의 일이었다. 나는 열두어 명의 사람들이 둥글게 둘러앉은 지하회의실에서 과연 누가 그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고른 것인가 궁금해 하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그 모임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함시사란 등단을 꿈꾸는 늦깎이 문학소녀들이 그런저런 문학잡지를 통해 등단한 선생님을 모시고 창작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시도 함께 읽고 서로 쓴 습작시도 합평하는, 그런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가서 보니 함시사는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일반적인 문화 프로그램과는 좀 달랐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함시사의 회원은 모두 스물한 명이었고, 각자의 사정에 따라 수요일 모임에는 대개 열다섯 명 안팎의 사람들이 나왔다. 신도시에 사는 젊은 주부들의 숫자가 많았지만, 군인, 교사, 목수, 변호사, 간호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고, 연령대도 중학생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고루 분포돼 있었다.

중년 남자는 “무명씨(無名氏)/ 내 땅의 말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대…….”라고 끝까지 시를 다 읊고 난 뒤에 잠시 말을 멈추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며칠 전에 구청의 노점상 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던 중 노점상 한 명이 자살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노점상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하는 바람에 성산대교 부근에서부터 자유로가 막혔는데, 다들 아십니까?”
앉아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맞아요. 세 시간 동안. 정말 속상했는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혀 몰랐다.
“여직원과 함께 거래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한 시간 정도 가는 둥 마는 둥 차를 몰다가 이렇게 가는 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유소 옆에 딸린 작은 가게에 차를 세웠습니다. 거기에서는 커피를 팔더군요. 그래서 둘이 차양을 설치해놓은 가게 앞에 앉아 한강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지금 이 시간은 내 생애 가장 한가로운 시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여직원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이 도로가 왜 막히는지 알아? 예, 라디오에서 노점상들이 시위를 벌인다고 했잖아요. 아니야, 지겨움 때문이야. 내가 말했습니다. 신문에서 그 자살한 노점상에 관한 기사를 읽었어. 마흔세 살. 내 나이와 같더군. 마흔세 살이란 이런 나이야. 반환점을 돌아서 얼마간 그동안 그랬듯이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거야. 이 길이 언젠가 한 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게 끝나리라는 걸. 그 사람도 그런 게 지겨워서 자살했을 거야. 그리?를 마셨죠. 그 때, 이 시가 생각났습니다. 대학교 신입생 때 술집에서 곧잘 만나는 녀석이 있었는데, 술만 취하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 시를 읊었거든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우리와 학번도 같고, 과도 같더군요. 세상에……. 그런 시절들도 있었죠.”
“그 여직원에게 무슨 흑심을 품은 건 아니세요?”
내 또래의 여자가 키득키득 웃는 듯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내가 연필도 아니고. 게다가 마흔 지나고 나서부터는 헤어지는 게 일이니까. 그 여직원하고도 헤어졌어요.”
“그럼 사귀셨다는 말씀인가요?”
이번에는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할머니.
“뭐, 꼭 사귀어야만 헤어지나요? 만날 헤어지잖아요. 아침에 만났다가 저녁에 헤어지고. 마누라도 저녁에 만났다가 아침이면 헤어지는데…….”
“되게 안타까운 얘기네요.”
나도 모르게 내가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목소리가 좀 컸기 때문인지 다들 나를 쳐다봤다.
“청년은 이 모임에 오늘 처음 나온 분이죠? 혹시 시는 가져왔나요? 지금까지 보셨으니까 우리가 이 모임을 어떻게 진행하는지는 이제 아시겠죠? 시를 하나 읽고 왜 그 시를 고르게 됐는지 설명해주시면 되는 거예요. 한 번 해보시겠어요?”
약간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1 끝

11월 24일 2회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