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쪽

나는 떠날 것이다. 떠나는 날, 어디로 갈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물론 아주 먼 나라로 떠나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 정확하게 어느 대륙 어느 지방으로 갈지를 정하는 일이 남아 있다. 목적지가 정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내 마음은 정해졌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나는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다. 나는 떠날 것이다.

14쪽

나는 올해로 4년째 이 집에 살고 있다. 하지만 거의 정착했다고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방 한 구석 맨바닥에 매트리스만 놓고 자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가구라야 플라스틱 비키니 옷장, 식탁 하나와 의자 둘, 소형 가전제품 몇 가지가 전부이다. 나로서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더 많은 걸 소유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이제 곧 떠날 사람인데.

34쪽

"행동하는 인간이란 그 사람에 대해 아직 아무런 기록이 없는 사람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나는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항상 임시로 살면서,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매트리스만 바닥에 놓고 잔다거나 플라스틱 수저를 쓰는 것으로 볼 때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사는 일종의 모험가라고 자처한다. 이런 형태의 삶의 방식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무 것도 나를 붙잡지 않는다는 짜릿한 상상을 할 수 있다.

38쪽

나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이나 증오심을 품어보지 않았다. 나는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우며 어디에도 매이지 않았다. 나는 인간 세상의 불안정함과 불확실성을 고려해서, 무슨 일에건 개입했다가 후회하느니 차라리 아무 일에도 적극적으로 끼어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놓았다. 움직이는 땅에는 아무 것도 세우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행복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 마음은 편안하다. 그다지 불평할 일이 없다. 내가 사는 방식을 보고 놀라거나 화내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대로가 좋다고, 그리고 조만간에 나는 떠날 사람이라고 말한다.

41쪽

어느 날인가 나는 한 구경꾼이 마권을 손에 쥐고 자기 부인한테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자, 이것만 있으면, 집세는 문제없다구." 사람들은 경마에 모든 것을 건다. 행운의 번호, 좀더 멋지고 이국적인 곳, 하늘에서 내려준 만남, 좌우지간 지금보다 훨씬 나은 시간을 희망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할 거야. 잘 될 거야. 그러니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지.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50쪽

오늘날 영웅들의 삶이란 기간으로 보나 영역으로 보나 몹시 한정되어 잇다. 오늘날의 영웅들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도처에 출몰하는 반영웅, 그러니까 보통사람인데 비범하면서 아무런 야심이나 열정을 갖지 않은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영웅주의가 대중화 풍조의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소심함과 대범함이 동시에 추앙받고, 똑같은 영예를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구분을 한담? 도대체 자부심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64쪽

나는 떠날 것이다. 내 삶을 움켜 쥐고 있던 음산한 존재를 피해 멀리 떠날 것이다. 나는 새로운 존재,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 활기찬 삶을 요구하는 이방인이 되기 위해 기꺼이 떠날 것이다. 나는 떠날 것이며, 멈추지 않을 것이다.

66쪽~67쪽

나도 때때로 여자나 아이들, 가정, 자기 집, 바닷가에서 보내는 휴가, 친구들같이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에게 한사코 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도, 내가 분명 확신하건대, 행복이 있으며, 삶을 정직하게 채워줄 만한 무엇인가가 있다. 나는 이 유혹에 항복할 수도 있다. 하지? 것이 뻔하다. 틀림없이 나는 여러 가지 질문들로부터는 해방될 것이다. 왜냐 하면 확신에 찬 세계와 합류했으므로,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오로지 평안한 죽음을 맞겠다는 야심 하나만을 가진 채, 인생이 정상적인 수순을 밟아 굴러가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한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다. 나는 나에게 주어지는 삶을 고스란히 만끽하고 싶고, 그럴 수 있으리라고 계속해서 희망하는 쪽을 선호한다.

76쪽

내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세상의 다른 쪽 끝에서 소리소문 없이, 아무런 의식 절차도 없이, 스쳐가는 외국인에게 할당된 운명인 무관심 속에서 죽음을 맞을 것이다. 유일한 재산인 여행가방은 조심성 없는 원주민 경찰들이 알아서 나눠 가질 것이다. 린넨 정장은 이 사람이 갖고, 칼은 저 사람이 갖고, 누구 장 마리 라클라브틴 책 갖고 싶은 사람 있소? 아무도 없다고? 그러면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내 주검 역시, 대사관을 통해 조히해본 결과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니, 동네 화장터에 보내 화장하도록! 그리고 태우고 남은 재는 제일 가까운 공동묘지에 매장하도록!

내 주검을 어떻게 처리하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행복하게 죽을 것이다. 세상의 다른 쪽 끝에서, 뱃사람들이 바다에서 죽듯이, 배우들이 무대에서 죽듯이, 자동차 레이서들이 자기 자동차 핸들 앞에서 죽듯이.

-> 계속

84쪽

마흔다섯 살! 그런데도 늘 변함없이 영원토록 똑같다니! 나는 운동을 해본 적도 몸매를 특별히 관리한 적도 없다. 내가 보기에 시간은 나한테 크게 작용하는 것 같지 않다. 하긴 나를 늙게 만드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다. 여자도, 한참 자라는 아이들도 없으니 집착할 곳도 에너지를 축낼 것도 없지 않은가. 크리스포필로스 의사야 뭐라고 하든 간에 야간 근무조차도 나한테는 크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나는 그 시간대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모든 공격으로 부터 나를 지키는 회피와 경제의 과학을 실천하고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인생의 마모로부터 나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었고, 거울을 통해서 바라보는 결과는 제법 흡족하다! 사람들은 나를 서른 살쯤으로 본다!

그래도 이 젊음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이대로 살이 물러져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알 속에서 썩어버릴 마음이 없다면, 뭔가 하기는 해야 할 것 같다.

110쪽

내 여행가방에 들어 있는 물품 목록 :

크림색 린넨 정장 한 벌

밀짚모자 한 개

꽃무늬 셔츠 한 벌

샌들 한 켤레

새존용 칼 한 개

책 한 권

선글라스 한 개

짐에 슬슬 높이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옆으로도 벌어진다. 자주, 나는 가방을 열어본다.

아주 보기기가 좋다.

내 목표는 이 가방 하나만 지닐뿐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121쪽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는,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좀더 평화스럽고 느린 여행, 벼랑에서 세차게 떨어져 내리는 물이 아니라 졸고 있는 강물을 천천히 따라가는 듯한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의 여행은 요란스럽고 거창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느 날 아침 한 손에 트렁크를 들고 조용히,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떠날 것이다. "아, 자네 어디 가나, 파트릭?" "그렇네."

123쪽

떠난다는 것이 이제 습관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 자체가 사는 한 형태가 되었다. 아무 곳에도 가지 않으면서, 목적지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떠나기. 잠깐 스치고 지나가듯 항상 떠나는 상태에 있기. 우리는 모두 인생을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

126쪽

아, 물 속에 들어가면 정말 좋다! 산소 없이 솜처럼 두터운 물 속에 들어가 있으면, 호흡과 동시에 정지된 삶이 온통 내면적이고 밀폐된 것 같이 느껴진다. 몇 초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간 동안 우리는 우리 삶의 무게를 확연히 느끼며, 점점 더 강력하게 우리가 우리 내부에 지니고 있는 생명, 연약하면서도 강인하고, 소란스럽고 번잡스러우며 전도양양한 그 생명을 느낀다. 이게 바로 물 밑 2미터 50센티미터에서 맛보는 '깊이로 인한 취기'일까.

다음 수요일에는 1분 30초를 시도해볼 것이다.

127쪽

카지노는 가끔 사람들의 절망을 세일해버리는, 사람들에게 필요 없어진 돈을 없애줌으로써 절망의 무게를 덜어주는 기능도 수행한다.

128쪽

고통을 동반하는 게임은 절대 사절하라. 파트릭! 누구에게나 불행이 있는 법! 네 자리나 잘 지키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넌 다른 할 일이 있잖아.

130~133쪽

선한 일하기 연습이나 악한 일하기 연습이나 매한가지다. 둘 다 똑같은 의도에서 시작되니까.

(중략)

어느 날 아침에 쟌은 자기 짐을 꾸려 여행길에 올랐다. 뚜렷한 목적은 없이 그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겠다, 바닷가를 따라가겠다는 간단한 원칙만 세웠다. 그러니까 마치 세상의 끝이 어딘지 직접 확인해보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세상의 끝으로 다가가다보면 혹시라도 통로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볼 때 아이의 여행은 그다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그저 3개월 정도. 3개월 동안의 자유와,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해방, 꿈의 실현, 아이 나이 또래에서는 이런 행동을 가출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출은 비교적 흔한 일이다. 얼른 나이를 먹어야만 끝난다. "아니 이게 다 웬 여행 카탈로그예요?"

그 아이의 눈에는 내가 가엾고, 딱하고, 약간 망상이 심하고, 전형적인 비현실적 꿈만 꾸고 사는 나이 든 아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 뭘 기다리시는 거예요? 가면 되잖아요. 떠나세요.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서라구요! 바보같이 이러고 있지 말구요!" 나는 아이에게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아주 다른 식의 여행임을 납득시키려고 애를 썼다. 나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그 아이의 비판을 되돌리려고 애를 쓰는 나 자신이 놀라웠다. 아마도 나는 그 아이로부터 존중을 받는 것이 나한테는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대체로 나는 남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젊음과, 그 아이가 지닌 반항하는 인간에 대한 신뢰감, 그리고 그에 따른 귀결로 나에 대한 경멸심이 나와 가깝다고 느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나도 같은 편이라고, 나도 통로를 찾는다고, 미소의 나라, 아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어떤 곳, 이곳과는 다른 어떤 곳을 찾는다고, 가방은 벌써 다 준비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아이 나이에서는, 아직도 행동이 가능하며 이론보다 행동이 우선이라고 믿는다.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언젠가 또 다시 떠나리라고 마음먹을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그렇게 하라고 격려해주었다. 나는 그 아이가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얌전해지지 않기를, 지금 가지고 있는 왕성함을 슬기롭게 다스리기를 바란다. 나는 여행가방 안에 모든 것을 넣었다. 이건 내가 가진 폐쇄성을 뜻한다. 그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134쪽

내 주변 사람들이 바뀌고 있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처럼.

136쪽

군데군데에서 시간은 멈춰버린 것 같았다. 마치 특정한 부류의 사건은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치 시간에게도 사람의 기억과는 다른 예민한 몸이 있어서 모든 상처로부터 완치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기라도 한 것처럼.

141쪽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특별한 시간 보내기 방식을 가지고 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