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각박하고 마주한 현실이 자꾸만 싫어질 때, 바꾸고 싶어도 쉬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지쳐갈 때 현실을 벗어난 허구의 세계에 홀딱 빠져들 때가 있다. 판타지 영화가 주는 재미가 그렇다. 주로 영화를 통해 삶의 도피처를 찾곤 하는데, 오랜만에 그럴듯한 판타지 로맨스 소설을 만났다. 곧 영화로도 만나게 된다고 하니 기대되는 작품이다.

 

<레드 퀸 : 적혈의 여왕>은 저자의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탄탄한 스토리 구성과, 전쟁, 계층 간의 갈등, 죽음, 가족애, 사회적 메시지 등 뻔하고 흔히 다루어졌던 소재인데도 특별한 판타지 로맨스로 탄생한 느낌이다. 뻔하지 않은 이유는 스토리의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은혈과 적혈로 구분되는 특별한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붉은 피로 태어난 평범한 적혈과, 은색 피로 태어나 초능력을 가진 특별한 은혈들의 세계 그리고 적혈로 태어났지만 특별한 능력을 발견하게 되면서 은혈의 삶을 살아야 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보잘 것 없는 삶에서 특별한 삶으로 옮겨가는 사이 정체성의 혼란,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경험하며 세상을 경험하고 단단해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어쩌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온 것 같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녀가 처한 운명, 삶과 죽음에 대해, 사랑과 전쟁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책이다.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힘은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사랑과 이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적혈과 은혈로 구분되는 세계 속에서 그들의 삶은 뚜렷하게 대비된다. 적혈들은 받들고, 적혈들이 일하고 싸우고, 그게 그들이 사는 방식이다. 그들이 가장 잘하는 일이자 그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 규정된다. 적혈로 태어난 사람들의 삶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발버둥 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삶이 아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권리를 찾기 위한 싸움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절박한 삶이다. 은혈은 그 적혈들 위에서 그들을 이용하고 지배하고 힘을 가진다. 은혈의 세계의 왕은 적혈들을 전쟁과 파괴로 죽음으로 몰아넣기에 적혈들의 분노와 테러는 고조될 수밖에 없다.

 

"오래전 아빠는 우리들 보고 개미라고 하셨다. 은빛 태양의 빛에 불타는 붉은 개미들. 다른 이들의 위대함이 우리를 파괴하고, 우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권리를 찾기 위한 싸움조차 잃어버린다. 그저 우리가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처럼, 우리의 제한된 상상력을 넘어서는 능력과 힘을 가진 존재로 진화하지 않았다. 우리는 변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신체에 고여 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변했는데 우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_본문 86쪽

 

적혈의 가장 낮은 곳에서 나고 자란 소녀 메어 배로우. 17살 생일에 군대에 징병될 운명의 소녀에게 왕자와의 특별한 만남, 그 인연이 계기가 되어 자신에게도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것은 곧 자신의 모습이라고 알고 있었던 모든 것과의 이별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강제로 떨어진 채 다른 무언가가 되기를 강요받고,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가난하고 버릇없고 부도덕하고 우둔하며 소매치기였던 소녀가 왕자비가 되어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적혈의 천성을 가진 소녀가 특별한 초능력을 갖게 되면서 은혈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어떻게 극복하고 세상을 변화시켜가는지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재미를 더한다.

 

세계는 아름다운 만큼 위험하기도 하고 유용하지 않은 사람, 실수를 하는 사람들은 쉽게 제거되기도 한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는 쇼를 해야 하고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한다. 재미있는 판타지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우리가 맞닥뜨린 세상과 맞닿아 있다. 거부할 수 없는 힘, 권력, 경제적 부로 상징되는 보이지 않는 계급,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누군가는 거부하며 현실을 폭로하고, 고발하며 소리 없는 전쟁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거부할 수도 거부해서도 안된다면 참아내고 다시 앞으로 전진하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을까. 전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새벽은 적혈처럼 붉게 타오르니, 일어나라!!

 

 

*인터파크도서 신간리뷰단을 통해 제공된 도서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