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역사는 승자도 패자도 아닌 살아남은 자의 회고'

그런 책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읽었는데, 뭐지? 하고 자꾸만 처음으로 돌아가 살피게 되는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모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그랬다. 놀라운 반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반전이 궁금하여 읽은 책이다.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끝까지 읽고 반전을 다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책장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축적이 있고, 책임이 있고,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이처럼 거대한 혼란만이 남는 책이었다.

역사니, 시간이니, 기억이니, 죽음이니 많은 이야기거리를 던지지만 작가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혼란만이 가득한 '삶의 무게'는 아니였을까 한다. 토니의 삶과 그의 친구들, 여자친구 그리고 가족과 얽힌 이야기가 어느새 타인의 삶의 이야기가 되어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오류투성인지를 깨닫게 된다. 열 다섯 살의 나이에 자살을 해야 했던 학교 친구 롭슨의 삶. 소문은 있지만 진실은 그 너머에 있을 뿐 그 죽음의 원인을 따지고 알기엔 우리가 한 개인에 대해 너무 모른다. 역사에 대해 선생님과 맞짱을 뜰 수 있을 정도의 철학적 소양을 갖추었던 친구 에이드리언의 자살에 대해서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속시원하게 알지 못한다. 제 아무리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해도 무엇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모른다. 거기에는 롭슨과 에이드리언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와 친한 친구의 죽음을 맞딱드려야 하는 토니의 삶만 있을 뿐이다.

시간은 또 어떤가. 시간은 과거에 생생했던 일조차도 아련한 기억속으로 밀어넣어 끄집어낸다고 해도 그들이 자살을 했고 일찍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지, 얼마나 똑똑했고, 얼마나 멍청했는지가 아닐 것이다. 역사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알 수 있고 명백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결말이 궁금하여 책을 읽었지만 그 결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토니의 삶에, 에이드리언의 삶에 혹은 롭슨의 삶에, 베로니카의 삶에 뭔가 일어났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역사는 생 양파 샌드위치입니다. 죽자고 반복하니까요. 우리는 이제껏 역사가 트림하는 것을 보고 또 보았고, 올해에도 또 보고 있습니다. 폭정과 폭동, 전쟁과 평화, 번영과 빈곤 사이를 오가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와 천편일률적인 동요뿐이죠." (본문 34쪽)

십대 소년 토니가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60대가 된 후 바라보는 삶은 아득하지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세월의 무게만큼 축적이 있는 삶, 삶에 더해지고 곱해진 의미있는 삶일 거라는 기대는 과연 망상일까. 분명한 건 모든 이가 세월을 똑같은 계산법으로 축적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다. 마이너스인 삶도 있을 것이고 실수투성이인 삶도 있을 것이고 죽음으로써 생이 끝나버린 삶도 있을 것이고 책임이 따르고 혼란이 있다는 것이다. 40년이라는 공백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몰랐던 인간의 무지,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그나마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삶이고, 그조차도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삶이라는 것, 그 조차도 명백히 증명이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에이드리언의 말마따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먼지만 한 가시 같아도 그게 내 상처일 때에는 우주보다도 더 아픈 거'라는 말.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이 먼지만 한 가시인지, 우주보다 더 아픈 상처일지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안다', '이해한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다 알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난 여전히 에이드리안의 죽음의 원인도 모르겠고, 어떻게 베로니카의 엄마 사이에 에이드리안의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모든 일에 항상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는 그냥 일어난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