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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는 뻔하다. 사랑하고 만나고 싸우고 헤어지고, 마치 일정한 패턴이라도 있는 양 반복될 때가 많다. 하지만 그 뻔한 사랑 이야기도 색깔을 입히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곤 한다. 그래서 그 뻔하고 식상한 사랑 이야기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고 재미있을 수 있다. 수많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넘쳐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재미있고 꾸준히 읽히는 이유이다.

결혼 후 찾아온 사랑, 불륜. 우리는 불륜이라 부르고 일상에서 드라마에서 소설 속에서 숱하게 봐왔다. 불륜의 결말 또한 사랑만큼이나 뻔하다. 비극으로 끝나거나 누구 하나 상처를 주며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는 것. 남들은 인정하지 않을지언정 로맨스였다고 믿고 싶은 것. 그 뻔하다는 사랑과 불륜이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소설이 있다. 프랑스 여류 작가 안나 가발다의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이다.

결혼은 이전의 삶과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가능성을 억압하기도 한다. 거기서 오는 갈등은 결혼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누구나 일탈을 꿈꾸진 않지만 우연도 겹치면 운명이 된다고 했던가. 어느 날 문득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곤 하는 것이 또 사랑이다. 알랭 드 보통은 말했다. 진정한 용기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 것이며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 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라고. 사랑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모든 것을 망가뜨릴 것을 각오하는 용기.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용기가.

근엄하고 무뚝뚝하고 다가가기 쉽지 않고 매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불륜으로 생의 가장 불행한 순간을 겪고 있는 며느리 클레어가 그들이 경험한 삶을 통해 사랑의 감춰진 속살에 대해, 인생에 대해 들려준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한 때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 있다며 결국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게 사랑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었고, 42년 동안의 침묵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수다쟁이가 되는 것이고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모든 것을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생에는 두 갈래 길이 있고,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노라고.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를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던 시아버지는 가끔씩 가지 않은 그 길을 생각하며 한숨 쉬며 슬퍼한다고. 그게 곧 인생이라고 말한다.

"삶이란, 네가 아무리 부정하고 무시해도 너보다 강한 거야. 그 무엇보다 강한 게 삶이야. 전쟁 중에 수용소에 갇혀서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본 사람들도 돌아와서는 아이들을 만들었어. 고문당한 사람들, 자기 가족과 집이 불타는 것을 본 사람들도 예전과 다름없이 버스를 잡기 위해 달음박질을 치고 날씨에 대해서 말하고 자기네 딸들을 결혼시켰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싶겠지만 인생이 그런 거야. 삶은 그 무엇보다 강해." (본문 206쪽)

클레어가 생각하는 인생은 어떨까. 그녀에게 인생은 체념이고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인생은 매우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폭풍우가 몰아치고, 광우병이 돌고, 전쟁이 벌어지고, 죽은 사람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때때로 인생은 아름답다고. 고생한 보람이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이다. 클레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인생에 대해 공감하고도 남는 이유이다.

"인생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금연을 결심하고 오랫동안 굉장한 의지력을 보여주다가도, 어느 겨울날 아침 다시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십리 길을 걸어가는 것, 혹은 어떤 남자를 사랑해서 그와 함께 두 아이를 만들고서도 어느 겨울날 아침 그가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미안해, 내가 실수를 했어."라고 말하는 걸 듣는 것, 그런 게 인생이다. 전화를 잘못 걸어온 사람이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라고 말하면,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런 게 인생 아닌가....." (본문 42쪽)

이 소설의 뻔한 연애 스토리가 아름다웠던 이유는 무엇보다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감춰진 속살이었고 무엇보다 삶의 따뜻한 위로가 되어준다. 소풍가기, 강가에서 낮잠자기, 낚시로 잡은 물고기 구워 먹기, 수영하기, 춤추기, 당신이 골라주는 구두와 속옷과 향수 사기, 신문 읽기..... 책의 2쪽 분량을 가득 채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보며 사랑이란 다름 아닌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사랑은 아프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그런 평범한 삶을 꿈꾸기도 하니까.

사람들은 사소한 거에 헤어지기도 하지만 사소한 것 때문에 운명을 건 사랑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소한 일로 헤어지는 일 따윈 없다고 한다. 사소한 일로 헤어졌다는 건 전부터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서로 사랑을 할 땐 사소한 것들은 정말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랑이 흔들린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이미 식어버린 사랑 앞에 사소한 핑곗거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생각한다. 사소한 일로 헤어지는 일 따위 없고, 사소한 것 때문에 사랑을 하는 일은 없다고.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거라고. 그리고 그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함께 하는 일상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사랑도 아마 거기쯤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