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과 빨간색이 대비되는 표지의 일러스트가에 느낌이 퍼즐과 같은 이 책의 복잡 미묘함을 암시하는 것 같다. 참으로 특이한 이야기이다. 다중적이고 다차원적인 인간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자, 인간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작과 끝에서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묘하게 꼬여있다. 마치 실타래를 풀어가는 느낌으로 조심스럽게 하니씩 풀어보려 하지만 더 얽혀버리는 느낌이다. 이야기의 끝을 보고도 끝을 보지 못한 느낌이 든다.

 

이 이야기는 주인공의 그럴 수도 있었던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 그럴 수도 있었던 세계는 단순하지 않다. 시간과 공간을 마구 넘나들면서 현재 내 자신의 정체성까지 희미해지는 느낌이다. 아마도 양자역학과 다중우주론에 등장하는 그런 가설들을 읽을 때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 백투더퓨처에서 과거 부모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재의 내가 점점 사라져가는 그런 느낌이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현실과 그럴 수도 있었던 세계에 공존한다. 등장인물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캐릭터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책을 다시 읽을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다. 다시 읽는다고 해도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인물들의 모습을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들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문구가 있다. 조금은 역설적인 부분이기도 하고 조금은 철학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그럴 수도 있었던 세계.” 이것은 마치 샤이니제이의 철학 책에서 나 나올법한 은유와 반복의 말장난과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 스토리의 진정한 핵심이고 모든 궁금증과 흥미로움의 근원이다.  

 

“과거도 미래도 어쩌면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회전하며 양방향으로 흐르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었는데’란 말은 과거형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미래형이 될 수도 있었다.    P203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주인공 해리가 살인범으로 주목받게 되지만 정작 해리 자신도 자신이 살인범인지 알 수 없다. 꿈과 현실의 시공을 2번 김해경의 손에 이끌려 다니면서 사건에 대한 힌트들을 얻게 되지만 그 또한 꿈과 현실의 묘한 경계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자신이 현재 머물고 있는 공간이 꿈인지, 꿈속의 현실인지도 알 수 없다. 마치 까도 까도 나오는 러시아인형 마트료시카를 연상케한다.

 

몽롱한 현실과 꿈의 경계, 서로에 대한 불신만 가득한 관계, 재연 범죄들과 실제 범죄들이 오버랩되는 상황, 다중인격적인 사람들, 양의 탈을 쓴 늑대의 이야기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불편한 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여느 소설과 다르지 않게 평범한 시작이었지만 중반부를 지나면서 뫼비우스의 띠를 타고 사차원의 세계를 여러 바퀴 돌다 나온 느낌이다. 뭔가를 보았어도 그 일부분에 대한 형체들만 기억에 남는다. 지나치게 꼬여있다는 느낌도 들고 등장인물들의 관계 설정 또한 일부 억측스럽고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이 모든 복잡 미묘한 것들이 있었기에 이러한 독특한 미스터리 판타지가 나올 수 있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개인적으로 살인이나 다중인격 등은 좋아하지 않는 소재이다. 그래서인지 중간 부분을 읽을 때 다소 짜증도 나고 겁이 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이 이야기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이 거대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존재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박지영이라는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녀의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