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소설은 자유롭다. 형식도, 내용도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 소설보다 자유롭다. 외국 소설을 읽고 있으면 마치 그 나라를 여행하고있는 기분이 든다. 이 책을 읽는 동안도 역시 그랬다. 이 책은 나를 1990년대의 스페인으로 안내한다. 상상력만 있으면 저렴하게 온 세상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들이 나눠 마신 와인은 아직도 내 혀를 적시는 듯하다.

 

체스를 좋아하는 나는,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림에 얽혀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체스 게임으로 풀어낸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체스 게임, 미술, 음악, 골동품 등 다양한 문화적 요소로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만들어낸 작가의 능력이 놀랍게 느껴진다. 작품 창작 기간의 절반을 자료 조사에 쓴다고 하니 그의 소설 창작에 대한 장인 정신이 엿보인다. 체스 게임은 물론이거니와, 미술품 경매와 복원에 관한 내용들, 바흐에 관한 일화라든지, 골동품 거래에 관한 내용들은 사전 조사가 없으면 묘사하기 힘든 부분이었을 것이다.

 

아쉬운 것은 결말이다. 결말이 좀 많이 아쉽다.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가 늘 그렇듯이 뭔가 긴장감 넘치는 반전을 기대할텐데 이 소설의 결말은 그런 사람들을 실망시켰을 것이다. 이 작가의 소설 [검의 대가]는 정말이지 결말까지 완벽한 수작이었는데 그걸 기대하고 이 소설을 보는 입장에선 아쉬울 수밖에 없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때 결말을 미리 염두해두고 쓴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겠다. 

 

1990년에 발표된 소설이라 그런지, 마약, 섹스, 흡연 등의 자극적인 소재가 쓰였다. 청소년들에겐 좀 그렇고 체스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책의 결말은 작가가 기자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할만도 하다.

 

주제

	"그렇지만 게임에서 승리하는 경우만 꼭 그런 것은 아니오."   "물론 그렇습니다." 무뇨스가 즉각 동의했다. "승리란 것을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의 패퇴에 대한 역설입니다." 그는 힐끗 훌리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돈 벨몬테 씨와 당신의 말은 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임 역시 그림처럼 자기 자신을 비난하니까요."   세사르는 흡족한 눈빛으로 무뇨스를 쳐다보았다. "바로 그거요. 패배 속에서 자신을 불멸화시킬 줄 아는 것...... 마치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셨던 것처럼 말이오.
페이지 : 464

 패배의 미학이랄까. 하나 더 인용해본다.

	"다들 당신이 최고라고들 하잖소." 순간, 체스 플레이어가 세사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얼굴 표정이 기이하게 바뀌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훌리아는 그의 표정과 심중을 읽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당신들이 얘기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최고? 좋습니다. 그러나 최고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최고라는 것은 머리칼이 금발일 수도 있고, 발이 평발일 수도 있는 경우와 똑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특별하게 증명해야 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중략)   "방금 제가 말씀드린 마음이란 이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기는 쪽이나 지는 쪽이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론가라는 말씀이시다?" 세사르가 사뭇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페이지 : 121~122

패자도 승자도 결국은 똑같다는 것. 이 책의 주제를 찾으라면 나는 이것으로 하겠다.

플랑드르, 체스, 추리, 아르투로페레스레베르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