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군가 깨워주기를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것은 그게 제아무리 괴기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를 미치게 만들지는 않아. 하지만 혼자서 새벽 두시의 국도를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다면 바라본 게 그저 평범한 벚나무 일지라도 미칠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런 거야>

정민의 삼촌은 그저 현실에서 걸어볼 수 있는 이국적인 길 '내셔널 지오그래픽' 몇권을 원했을 뿐이다. 중앙우체국에서 폭탄이 터지고 나라가 인증한 모범생대표의 인생은 거기서 마침표 하나를 찍는다. 삶은 꿈같은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다만 그때에는 '폭력의 반대말'을 찾던 우리에게 '권력'이라는 말이 찾아졌기 때문에 꿈의 명도는 확연히 떨어졌다. 빨리 깨어나고 싶었던 악몽. 정민은 정신과 의사에게 말했다. "치료받을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저를 깨워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2. 한 존재가 빛을 찾을 때

 <그 글은 함께 불태워버리려고 했던 입체 누드사진처럼 너무나 개인적인 경험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리라. 할아버지의 일생은 바로 거기에 있었으리라. 그러니까 단 하나의 실날같지만 확실한 그 무엇에> 할아버지는 친지들을 모아놓고 자기의 삶을 시로 읊었으나 친지들은 '누구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시네' 라고 '전체적으로' 듣는다. <한 남자의 일생에 몇켤레의 신발이 필요했는지> 알고자 했다면 할아버지 삶의 그 모든 과정은 더욱 깊은 의미로 매듭지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고난의 한국사는 쌀알같던 개인들의 삶을 통째로 집어삼켜 죽으로 만들어버렸다. 왕의 개인사가 나라의 역사인 것처럼 떠들어대는 사극처럼, 사람들은 전체가 모여 개인을 이루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왔다. 소설은 줄곧 개인의 사소하면서,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날같은 그러나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확실한 것들에 대해 집요한 조명을 한다. 어두웠던 한 존재가 또렷한 빛을 찾을 때, 그제서야 둘 셋이 서로를 비추고 마침내 온우주가 찬란히 빛난다. 

3. 그누구의 불행도 슬픔도 아닌 사람.

<그의 삶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불행으로 가득했고... 하지만 그런 과정을 그쳐 그가 그 무엇에도 훼손되지 않는 행복을 발견하게 된 것은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것은 정민의 삼촌이, 어쩌면 나의 할아버지가 한평생 꿈꿨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행복은 환각이 아니었다. 실날같기는 해도 그건 단 하나의 확실한 무엇이었다>
이 부분은 소설속 인물들의 삶을 모두 얘기해준다. 사실 우리의 삶도 실날같은 우연에의해 어떤길에 접어들며, 실날같은 마음의 움직임으로 깊은 사랑에 빠지고, 실날같은 희망으로 아이를 낳으며, 블랙홀같이 거대한 권력앞에 사람이 주인되는 세계를 만들겠다고 실날같은 목소리로 외치며, 실날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욕망때문에 세상을 암흑으로 몰고가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작고 가느다란 실날은 곧 얼마나 큰 실뭉치이더냐.

4. 바다물결보다 추진력이 약한 배

나와 정민은 국가권력보다는 조금 덜 딱딱한 하나의 체제안에서 사랑을 했다. <우리는 늘 뜨거웠으므로, 우리 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제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다 느낄 수 있었다> 뜨거워야 찬 바람을 느낀다. 뜨거울 수록 하나도 놓치지 않고 느낄 수 있다. 삶을 치열하게 살고 싶다면 지금보다 더 뜨거워야 하리. 정민은 자기앞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자 애썼다. 그건 조개가 진주를 품는 과정이다. 많이 마음에 끌어안을수록 아픈법이다.

'나'는 어느날 학교를 나와 서울의 거리를 멀리멀리 걷는다. 현실의 거리들이 꿈과 같았다. 도대체 현실이 악몽인 세상을 걸으며 나는 서점에서 한 문구를 읽는다. '네가 스스로 말살시킨 고유의 천성을 되찾고, 그 누구에게도 인생을 맡기지 말고, 무엇보다 네 자신이 될 것' 그리고는 알의 껍질같은 영안실로 들어가 죽고 또 산다.

하지만 나라는 배는 바다물결을 이길 추진력을 갖고 있지않았다. 지극히 인간다웠으므로.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반딧불이의 약속을 정민에게 남기고 독일로 간다. 다른 이들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를 확인하기 위해.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 한가운데로.

5. 사랑은 이해되지 않고, 존재는 내 것이 되고.

<광주 시민들을 죽인 사람들에게도 사랑이 있었을까? ... 헬무트는 인간이 이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모두 사랑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증오도 이해했고 분노도 이해했지만, 결국 사랑만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내게 틀어놓았다.> 독일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런거였다. 자유란 관념이 아닌 욕망이라는 것. 육체보다 정신보다 질기게 꿈틀대는 욕망이므로 자유의 심장에 구멍을 낼 탄환은 아직 세상에 없다.

안젤라 아줌마의 이야기는 감동이다. 간호사로 독일에와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한국남자와 결혼도 하고 21년만에 이혼한다. 독일에와서 처음 만났던 외로운숲길을 다시 찾아가 따뜻한 눈물을 끊이지 않는 강처럼 흘러보냈다. 미친듯이 그려나가던 그림들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인 동시에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읽고 또 읽고 그녀와 함께 울었던 대목이다.

6. 라디오가 전하는 사랑의 언어

<아무 내용도 없는, 그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알려주고자 하는 그런 간절한 욕망. ... 그리하여 외로웠으므로, 정민은 밤하늘을 떠다니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처럼 누군가에게 연결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꼭 같이 라디오를 듣겠노라고....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되므로.>

그래. 우리는 가 닿을곳을 찾아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하나의 외로운 전파들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가 닿고자 하는 전파적 욕망이다.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리며 우리는 세상의 사랑들과 연결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름다워진다. 

할아버지와 정민과 삼촌과 강시우와 '나'에 대해, <거기 한 사람의 인생이 왜 바뀌게 됐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는 한 사람의 생이다.나와 너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바뀌어가는 생의 길위에 놓인 연약한 체온을 식지않도록 덮혀 줄 것이다. 너의 절망을 이야기 해달라 나의 체온을
나누어 줄테니. 너의 절망의 이야기는 내안에 씨앗으로 뿌려지고, 나는 언젠가 그 꽃들을 한아름 너에게 안겨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