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놓고 안읽은 책 중에 얀 마텔 전집이 있다. 예전 인터넷서점에서 50%라는 어마어마한 할인율에 '어맛! 이건 사야해!' 하며 구입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서 좀처럼 사놓은 책은 잘 읽지 않게 된다. 지난번 얀 마텔의 최근작인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먼저 읽게 되면서(게다가 재미있게 읽게 되면서) 올해 목표는 얀 마텔 전집 읽기가 되어버렸다.

  전집 구성 세 권 중 가장 먼저 읽기 시작한 것은 <파이이야기>. 부커상을 받으며 얀 마텔의 명성을 알려준 작품이다. 꽤나 유명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정보라고는 인도소년이 동물들과 태평양을 표류하는 이야기라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난 <15소년 표류기> 식의 모험과 소년과 동물들과의 우정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초반을 읽을 때만해도 도대체 표류는 언제 하는 걸까 궁금했었다. 소설의 전반부에는 표류기보다 동물원집 아들인 소년 파이가 힌두교와 이슬람교, 기독교를 모두 섭렵하며 널린 사고로 신을 받아들이는 부분이 더 많이 등장한다. 그러다 동물원의 문을 닫게 되면서 캐나다로 함께 가는 동물들을 몇 화물선에 싣고 온가족이 이주하다 화물선이 난파되면서 소년의 표류가 시작된다.

  32인승 구명보트에 인도소년 파이, 뱅골 호랑이 한 마리, 하이에나 한 마리, 오랑우탄 한 마리,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한 마리가 타고 있다. 1명과 4마리의 우정이 샘솟는 건가 싶었는데 순식간에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먹어치운다. 파이의 차례인가 싶었는데 뱅골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공격하고, 드디어 배에 호랑이와 파이 둘만 남게된다.

  책을 읽으며 얀 마텔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내내 고민했다. 소년의 신나는 모험은 당연히 아니고, 인간과 동물의 종을 초월한 우정..도 아닌 것 같고(조금쯤 조련한 것 같긴 하지만), 절망의 순간에도 끝내 신을 버리지 않는 파이의 예를 보여주며 신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거의 마지막 부분이 되어서야 절망과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와 호랑이의 표류이야기는 나중에 파이가 겨우 멕시코 연안에 도착한 뒤 화물선 파선에 대해 조사하러 온 일본인들에게 하는 이야기인데, '동물이 안나오는 버전'의 표류이야기를 듣고 나니 <베아트리스와 버질>에서 느꼈던 충격이 다시 돌아오면서 인간은 동물보다 더 동물같은 면이 있다는 점, 절대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생각, 인간성이라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얀 마텔 전집에 아직 <셀프>와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이 남아있는데 이 두 권마저 <베아트리스와 버질>, <파이이야기> 못지 않은 수작이라면, 난 아마 얀 마텔 전집을 사다두고 빨리 읽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 같다.

 

 

씨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