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를 읽어야지 생각하다가도, 두어 번 망설였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원작 소설을 읽는 것은 왠지 유행을 쫓는 것 같아 싫었고 뭔가 <은교>는 밤에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실제 뒷쪽 작가의 말에 '밤에만' 쓴 소설이니 '밤에만' 읽어달라는 당부를 보고 놀라웠다) 요즘 자기 전에 좀처럼 책이 안 읽히는 탓이었다. 밤에 꺼냈으나 밤에 읽지 못하고 비오는 날, 일찍부터 어둑해진 오후에 읽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소재가 참 통속적이다. 어린 소녀를 사랑하게 된 늙은 시인과 그 시인을 보살피는 젊은 작가. 우연한 기회에 사제의 연을 맺었으나 문학에의 갈망을 채우지 못한 제자는 스승의 원고로 등단하며 명성을 얻었지만 늘 언제 밝혀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다른 작품을 쓸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점을 알고 주눅들어 있다. 미지근하게 소녀를 안기 시작했으나 후엔 스승보다 우월한 느낌을 갖기 위해, 스승이 소녀를 욕망한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열심히 소녀를 안게 된다. 소녀는 어린 마음으로 저를 사랑해주는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면서도 늘 소외받는 것은 자신이었다고, 그 둘이 자신을 밀어내었노라고 말한다.

  책을 읽는 내내 '글이 먼저 써졌으리라' 생각했다(이 역시 뒷쪽 작가의 말에서 한 달 반만에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생각이 앞서 달린다. 모두들 저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며 다른 사람의 세계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다른 사람의 세계가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수밖에. 알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늙은 시인은 자신의 제자가 혈육보다도 자신을 잘 돌봐주고 있고, 자신이 곁을 줄 정도로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멍청한 놈이라며 무시하고, 자신의 노기와 살의를 발현하기 위해 '자신의 처녀'가 '도둑놈'에게 유린되었다고 생각한다. 젊은 작가는 '사랑하는 나의 선생님'이 고작 어린 계집애 때문에 추악해진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신은 못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한다. 그리고 둘 다 어렴풋이 서로를 알고 있었으나 외면한다. 늙은 시인이 마지막에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라든가, 제자가 차를 정비 받으러 가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를 내주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렴풋할 뿐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없었다.

 

  제일 알고 싶은 것은 은교의 마음이었으나 그녀의 노트를 훔쳐보지 못해 아쉬웠다. 옷 말고 몰스킨 노트도 하나 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혹 모르겠다. 그녀도 시를 쓰기 시작했다니.

 

  요즘 박범신의 소설들이 오랫동안 마음을 잡아끄는데, 참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소설들을 내놓는 것 같다.

 

 

 

 

 

 

 

 

 

 

 

 

 

 

 

 

 

 

 

 

 

 

 

 

 

 

씨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