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을 나는 <도키오>를 통해 처음 들었다.

몇해 전부터 일본 소설이 굉장한 붐을 일으키고 있긴 하지만 일본문학쪽에 워낙 관심이 없었기도 했고, 또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일본문학의 거대한 산을 이미 마음깊이 사모하고 있었기에 다른 책은 관심을 쏟을 생각조차 못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면 일본 문학은 따라올 자 없다 교만하게 단정하고 있었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영화 <비밀>의 원작자라는 얄팍한 지식만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를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귀여운 꼬마돼지의 통통한 몸통을 연상시키는 깜찍한 분홍의 표지색과 위트 넘치는 일러스트에 더 맘이 빼앗긴채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꽤 두꺼워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줄 알았는데, 책 읽는 시간은 다만 책의 두께에 정직하게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도키오>를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된다.

500쪽이 가까운 두께를 초월하는 <도키오>만의 매력이 있었다고나 할까?

술술 읽히는 문장의 재미도 그렇거니와 치밀한 이야기의 구조도 그렇고, 게다가 이것저것 챙기느라 흔히 빠뜨리기 쉬운 각 캐릭터들의 생생한 심리와 성격묘사까지... 마지막 세 페이지를 남겨놓고는 훌쩍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한다. 이런 욕심쟁이, 이 놀라운 재주와 아이디어에 넘치는 위트,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감동까지! 히가시노 게이고는 천.재.야.

한끗만 잘못하면 SF공상과학 소설로 변신할 수 있었을 주제, 죽음을 앞둔 아들이 23살의 젊은 아버지를 찾아 시간여행을 한다! 이거 완전 소설이네! 라고 웃어넘기고 말수도 있을 주제를 히가시노 게이고는 기가 막히게 현실감 있는 소재로 탈바꿈 시킨다. 어, 이거 정말일 수도 있겠어 라고 읽는 동안 생각하게 만드는 마법같은 힘이 그에게는 있는 것 같다. 분명 소설인줄 알고 읽었는데도 나는 어느새 한심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하는 아버지 다쿠미를 바라보는 깊은 눈의 도키오가 되기도 하고, 자신을 미래에서 온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엉뚱한 미스테리 청년 도키오에게서 말할 수 없는 묘한 애정을 느끼는 다쿠미가 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정신없는 한바탕 소동에 휘말리면서 나는 한심하기 짝이없는 한 인간이 누군가에 의해 서서히 성숙하는 모습을 배우기도 하고, 바꿀수 없음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누군가를 보호하려 하는 깊은 사랑에 대해 배우기도 한다. 또 다쿠미와 도키오를 바라보면서 날 바라보는 우리 아버지의 눈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나서야, 조금은 공감할 수 있게 된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늘 느끼는 거지만, 이 책이라는 존재는 단지 종이위에 잉크로 인쇄된, 500그램쯤 나가는 단순한 물건의 의미만은 아닌것 같다.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책이건간에 그 속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그 지혜가 내 경험과 맞물릴때 일어나는 거대한 영향력은 정말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이 책읽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오늘 읽은 <도키오>는 내게 내 아버지와 부모로서의 나를 생각하게 한다. 재미로 읽을라치며 그럴 수도 있는 소설이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도키오처럼, 이제 너도 묵묵히 아버지의 뒤를 돌봐드릴만큼 자랐다는 걸 기억하렴. 그리고, 다쿠미처럼 이전의 삶은 어땠는지 몰라도 이제 네가 맡겨진 아이를 도키오처럼 멋진 청년으로 키워낼 책임이 네게 있음을 잊지 말길 바래.

마음속에 꼭 새기겠다 혼자 약속해본다.

몇번이고 읽어볼만한 소설이다. <도키오>는.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또다른 내 거대한 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