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텐 직업이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고, 그런 다음에는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지 알아봅니다. 그건 하루 종일 매달려야 하는 일이죠. 커피를 마시려고 쉬는 시간도, 주말도, 보너스도, 휴가도 없이 말입니다.”
소설 ‘달의 궁전’을 읽어 나가다 만난 저 문장 앞에서 나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인간이다’라는 명제 하나가 우리에게 잠재 된 근원적, 혹은 원죄적 의식으로 뿌리박힌 개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기에는 정말로 부족한 것인지에 대하여.

물론 저 명제도 때에 따라 사용 목적이나 방법에 따라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으로 분리되기는 한다.
하지만 분명한건 그것이 어느 쪽이든 ‘조건’에 들어간다는 차원에서 보자면 정체성과 관련 된 문제의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엔 어떠한 누구도 토를 달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저 명제처럼 단순하게 해석되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운명과 선택의 상호작용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이 가볍지만 묘하고도 긴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상호작용이 우리에게 하여금 삶 속의 인과법칙에 대한 작은 울림들을 계속해서 귀 기울여 듣도록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인과법칙이라면 당연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기는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스로에게 약간의 자각과 인식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사람들은 늘 정해진 운명과 만들어가는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에 대해 그저 생각과 해석의 차이일 뿐이라고 단정 지으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나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건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다.)을 안 이후에 자각과 인식의 문제로서 내가 왜 존재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도 태어난 이상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차원에서 아버지도 모른 채, 사생아로 태어난 주인공 마르코는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한 그가 멀게는 엄마의 죽음과 가깝게는 삼촌의 죽음을 겪으면서 최소한의 보호막조차 없어진 사실, 즉 제대로 된 고독을 깨달으며 처음엔 자신의 삶을 될 대로 되라 식의 점프 형태로 세상 속에서 강행하는 것인데, 그것이 내가 보기엔 그의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행동으로 옮기는 진지한 첫 번째 의식이 아니었나 하는 느낌이 든다.

저자는 그의 그러한 과정을 주되게 그리면서 때로는 책 ‘호밀밭의 파수꾼’ 속의 방황하는 주인공 홀든을 떠 올리게도 하고, 때로는 책 ‘연금술사’ 속에서 운명을 따라가는 주인공 양치기 소년을 떠오르도록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연과 운명의 선택을 무의미한 듯, 의미 있는 듯 교묘한 표현으로 교차시켜 보여 준다.
“오늘 오후에 책들을 세어 봤더니 1천4백 92권이더구나. 내 생각으론 그게 행운의 숫자 같다. 그 숫자는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기억을 떠 올려 주는데, 네가 가려는 대학이 콜럼버스의 이름을 땄으니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시간에 옳은 곳에, 옳은 시간에 잘못된 곳에 있었다. 언제나 서로를 놓쳤고,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전체적인 일을 알지 못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알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말 할 수 있겠다. 즉 자신이 몰랐던 과거 사실들을 현실적 선택(우연)과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듯한 선택(운명)을 해 나가면서 말이다.
다만 우리나라 독자들이 식상해 마지않는 ‘출생의 비밀’이 달의 궁전의 주된 소재라는 것에 약간의 식상함을 선사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몇 몇 문장을 통한 삶에 대한 통찰력은 단순히 표현적 차원에서 멋있게만 보이려고 하는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믿는 세상에 대한 법칙을 깨달아 그것을 글로 진중히 옮겼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는 점일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누구든 어떠한 과정을 통해 결과론적으로 무언가 깨닫는다함은 언제나 삶의 시작점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의 인식과 자각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직업을 충실해 수행 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오르막 내리막길을 걷고 세상의 끝이라 믿는 곳에 서 있을지라도.
“.......해변 마을로 이르는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내 호주머니에는 4백13달러가 들어 있었다. 그 언덕 꼭대기에 이르자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 왔지만 나는 물가에 이를 때까지 내리막길을 계속 걸었다.......나는 세상 끝까지 온 것이었고 그 너머로는 바람과 파도, 중국 해안까지 곧장 이어진 공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여기가 내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