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더듬더듬 말했다.

“저는 자다가 흡수돼서…… 기억이 구체적인 게 아니에요…… 설명하자면…… 악몽 같았습니다…… 길게 가위가 눌리는 느낌이었어요…… 몸이 없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구의 표면을 통과한 몸이 바로 조각조각 분해되어 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마지막으로 머리가 구 속으로 들어갔을 때는 꼭 깊은 우물에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죽음을 겪는다면 그런 느낌일 겁니다…… 몸도 없고 영혼은 파괴된…… 영원히 두렵고 막막한…… 그런 고통 속에서…… 그런 고통에 빠져 살아야 하는 끝없는 악몽 같은…….”

“절망입니다!”

남자는 외쳤다.

“구에 흡수될 때 느낀 건 절망입니다. 그 끔찍한 절망을 확실히 기억합니다. 그건 안 겪어본 사람은 모릅니다. 몸으로 느낀 감각이야 남에게서 들은 걸 흉내 내어 말할 수 있지만 그 끔찍한 절망은 이해 못 합니다.”』

에밀 시오랑은 ‘절망의 끝에서’라는 책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비극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드는 불면의 고문을 겪어 보았는가?’라며 독자에게 물어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역사의 의미는 아무런 존재가치도 가질 수 없음을 알거라면서.

나름 의미 있다고 생각해 왔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의미로 둔갑되는 순간이야말로 절망이라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것이다. 어디 역사뿐이겠는가. 철학, 경제, 정치, 예술 등등 모두 그렇지 않을까.

갑자기 사람을 흡수하는, 마치 볼링공과 같이 생긴 크고 검은 구가 세상에 나타나 벌이는 일대 혼란을 다룬 이 소설은 최후까지 저러한 절망감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남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인 심판대에 오르게 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작가는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는 미니시리즈를 보도록 만들듯 그 여정을 긴박감 넘치면서도 재미있게 묘사한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이 작가의 스타일이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작가가 문장들 속에 이렇다할 멋스런 수사법을 쓰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벌어지는 상황들을 사실대로만 전달하고 있구나, 라고 느껴질 만큼 직설적이었다.

문학상 수상작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그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단순한 묘사에 의존하면 장르를 떠나 쓸데없는 반복으로 쉽게 늘어지거나 억지로 폼 잡듯 문장을 치장하는데 너무 신경 쓰다가 촘촘할 수 있었던 스토리를 느슨하게 만들기 쉽던데(특히 신인 축에 속하는 작가들 작품에서), 이 작가에게서는 개인적으로 그런 점을 쉽사리 발견할 수가 없어 좋았다.

대신에 사건 중심의 창작 소설이니만큼 스토리 전개상 중요하게 느껴지던 몇 가지 부분에서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타당성 있는 아이디어를 작가가 덧붙였다면, 좀 더 짜임새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이 소설은 절망이외에도 두려움에 대처하는 우리의 평소 실상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점은 소설이 그것과 맞서 싸우는 모습대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떨까 하는 모양새쪽으로 독자들을 이끈다는 점이다.

마치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는 말처럼 반복되는 절망과 두려움, 거기에 따르는 우울함도 결국 그런 것일 테니 어떠한 것도 특별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는 생각에 미치도록 한다, 랄까.

작가는 그것을 혼란 속에서 구가 아닌,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삶을 포기하게 된 사람들과 반대로 구에 흡수 된 사람들의 대비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마음이 변하듯 그 상황은 강자를 약자로, 강자를 약자로 위치 변화시킨다. 그것은 곧 선과 악의 대결이 되기도 하는데, 그 선과 악에 고루 적응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살아있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인간의 되풀이 되는 순환적 고뇌를 대변하기도.

더불어 그것은 역사가 가진 고뇌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개인의 고뇌가 군중에 편입됐을 때, 역사의 고뇌는 심판받게 되는 것일 뿐, 앞의 저 두 사람처럼 같은 경험이라도 다른 표현이 있을 수 있음에도 오직 하나의 진실만을 요구받으며.

그런다고 영원히 개인의 고뇌든 역사의 고뇌든 없어지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상하게도 인간은 권태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하지만 시작과 끝, 그 어느 것도 없이 이는 저러한 고뇌의 순환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권태도 못 느끼는 듯 하다. 그 고뇌가 우리의 죄 없는 잠에게 마저 권태를 부여해 고통스런 불면의 세계로 여행가도록 하는데도.

『남자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절망을 피해 도망쳤다. 이것은 남자의 도주에 대한 기록이다. 남자는 도망친다.』

마치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듯한 글로서 끝맺는 이 소설처럼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이 우리에게 쥐어진 유일한 답이라면 거기에 서린 절망적인 느낌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때야만 할까, 이 소설은 결국 그것을 생각토록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