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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 수필이 아닌 소설을 읽고 독후감상문을 쓰는 것은 꽤 오랜만인 것 같다. 최근에 나는 무기력증이라는 안개에 온몸이 휩싸인 우울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무'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고, 생명체는 어쩌다가 탄생해서, 왜 지금껏 존재하고 있는지, 사회라는 것이 왜 이루어져 있는지, 왜 많은 사람들은 고통 속에 빠져 살고 있는지, 나는 왜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어느 질문에 대한 해답을-해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그럴듯한 답변을 원했다-내리지 못한 채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채로 그냥 하루하루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순식간에 '도가니'를 다 읽어버린 후, 일단 열심히 살아서 성장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펼치자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바로 안개였다. 무진이라는 곳에 안개가 많이 낀다고 하며, 책 중간중간 잊을 만 할 때마다 나타나던데, 처음에는 몰랐다. 안개라는 소재가 진실의 은폐하는 장벽을 의미하는 것인 줄. 청각장애아들을 가르치는 자애학원의 기간제 교사로 임시 발령을 받아 무진으로 내려가는 강인호의 등장으로 톱니바퀴가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학교 운동장에서 처음 만나 말을 걸어본 농아의 비명소리, 교무실의 이상한 낌새,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또 다른 비명, 세탁기 통을 이용한 지도교사의 고문 등, 수상한 점을 하나하나 발견해나가다 결국 오래도록 숨겨져왔던 진실을 알게 된다. 학교의 선생이라는 사람이, 행정실장이라는 사람이, 교장이라는 사람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을 약 십여 년 간 성폭행하고 학대해왔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유리한 축들을 중심으로 그 끔찍한 사실이 내내 은폐되어왔다는 사실 말이다.

책에 대한 간략한 내용은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아이들이 수화를 통해 진술한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글을 읽는 내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냥 읽기만 했는데도 눈물이 차올랐다. '아, 이런 느낌을 '분노의 도가니'에 빠졌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는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도 사회적 약자인 청각/지적 장애인을 대상으로.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오히려 애꿎은 짐승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음에도 부디 사실이 아니었기를 바라고 바랐다. 내가 당한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 화가 나고 슬픈데,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그리고 당사자인 그 아이들은, 주변이라고 해 봤자 도움을 요청해도 쉬쉬하며 뿌리치던 선생님들뿐이던 그 어리고 맑은 아이들은, 그런 일을 몇 년 씩이나 계속 겪어오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거부당하자, 강인호를 비롯한 자애학원의 선생님들과 서유진을 비롯한 무진 인권운동센터 간사들은 힘을 합쳐 여러 언론매체에 알리기로 하면서 이야기가 차츰 전개된다. 사건은 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을 받게 되고, 정말이지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친다. 힘들었던 시간만큼, 진정한 권선징악이 보이기를 내심 기대해 보았다. 하지만 징역 이 년 육 개월에 집행유예 삼 년 등의 판결이 전부였다. 십여 년 간 수십 명을 성폭행했는데 전과가 없으며, 집행 유예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돈으로 쉽게 뒤덮을 수 있는 게 인권문제였던가. 실제 사례였던 광주 인화학교 성폭행 가해자 사법처리 현황에 대해 검색을 해 보았다. 소설과 거의 비슷했다. 눈을 씻고 보아도 집행유예라는 지나치게 관대한 네 글자만 보였을 뿐. 교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교직원들은 일 년도 채 되지 않는 가벼운 형을 끝내고 다시 학교에 복귀되었다고 한다. 2000년부터 행해지던 이 사건이 처음으로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던 것이 2005년이었고, 법원에서 솜방망이 판결을 받은 것이 2007년이었으며, 소설이 출간된 것은 2009년이었고, 영화가 개봉된 것이 2011년이었다. 그제야 다음 해인 2012년, 학교가 폐교되었다.

세상은 어린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청렴하지도, 정의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럽고, 치사하고, 못났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지?하고 누군가 물으면 그녀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 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만 배쯤의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어쩔 수 없지만 모두 사실이다. 이 사건뿐만이 아니라 거짓말이라는 시꺼먼 잉크로 더럽혀진 세상이라는 이 호수를 다시 맑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잉크는 이미 너무 많이 떨어져 버렸으니까. 그것의 만 배쯤의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선한 사람들이 맑은 물을 한 바가지 부으면 반대인 사람들이 잉크를 항아리째로 가져와 쏟아버리는 곳이 세상이니까. 그냥 다 내팽개쳐버리고 돈과 권력에 굴복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늪 속에 숨은 채로 감언이설을 하며 발목을 잡아당기는 사탕 발린 손길이 뻗치고 있으니까. 정인호가 그랬다, 어려운 싸움이라고. 그래도 그걸 지키려고 누군가 몸을 던질 때 비로소 일어나 제 힘을 내는 게 진실이라고 했다. 서유진도 그랬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서 아주 조금이라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어쨌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다 접은 지 오래지만 악한 사람들이 자신을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울 거라고.

소설의 마지막 장에는 아이들의 소식에 대한 서유진의 편지가 나온다. 이 일이 있기 전과 이 일이 있은 후 가장 변한 게 뭔지 물었더니 민수가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도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거요."라고. 다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지 그럼. 그걸 왜 여태껏 모르고 살아왔니. 왜 아무도 네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그녀처럼, 나도 그때 하마터면 울 뻔했다.

그리고 그때 삶의 이유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왜 지구별에 태어나서 굳이 고통받으며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태어난 것이 자의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살아가야 하는 거, 계속 태어나서 살아갈 훨씬 더 어린 존재들을 위해서 한 번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 보자고. 나도 아직 도움이 필요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나 끼치는 존재 같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민폐 안 끼치고 사는 사람 없으니 내 작은 도움이 필요한 곳 찾아 도우며 살아가자고. 내가 쓴 글 한 편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이 글을 읽는 몇 명의 사람들이라도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진실의 맑은 물 한 방울이 퍼져나가며 조금이나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상한 일은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사람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은 정나미가 떨어지는 그만큼 인간에 대한 경외 같은 것이 내 안에서 함께 자란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너무 끔찍하게 느껴지던 동시에 사람이라는 존재가 너무 경이롭게 다가오던 내 감정을 정말 그대로 표현해 준 작가의 말 한 줄이었다. 사람이기에 어두운 잉크를 떨어뜨리지만, 사람이기에 맑은 물도 채워 넣을 수 있지 않을까.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잠시 여담을 하자면, 공지영 작가가 '도가니'라는 소설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라는 신문기사 한 줄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이 소설이 영화화된 것은 배우 공유가 책을 읽고 충격에 휩싸여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우연히 본 그의 인터뷰 영상 한 편이 계기였고, 내게 이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 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는 점에도, 나라는 한 개인의 흔들리는 삶에 이정표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도, 두 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도가니, 공지영, 공유, 인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