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본적인 형식은 상당히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숨은 내뱉은 다음 들이마시고[呼吸], 눈꺼풀은 한 번 열린 다음 한 번 닫힌다. 그리고 먹었으면 배설하는 것이 존재의 법칙이니 퍽 “단순한 형식”(「화장실 앞에서 밥을 먹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양론(陰陽論)의 지적에 의한다면, 인간은 그 단순한 호흡조차 제대로 못해서 제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다. 아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사이에, 음식물을 먹고 배설하는 사이에,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는 사이에 무거운 생활이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활 속에 갇히면 삶의 기본적인 형식이 보일 리 없다. 생활을 관조할 수 있는 “미묘한 거리”(「문득, 집 앞에서」)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패배는 나의 힘』의 미덕은 분명하다. 가령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이력서를 부치는 시인의 심정을 보라. 선택의 여지는 없다. 생활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하지만 반성적인 거리는 마지막까지도 잃지 않고 있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그래서 “멀리 보니 보인다”(「멀리 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투명한 반성이라고 할까. 현실(생활)의 지반에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고 저 하늘 위로 비상하려 했던 대표적인 시인으로 김수영을 꼽을 수 있다.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이 치열한 반성이었던 바, 김수영의 후기 시편에 흐르는 시간과 정지한 순간의 충돌로써 꾀한 모더니즘의 형식을 제거하고 나면 황규관의 『패배는 나의 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생활의 “비루함”(「전기 콘쎈트가 망가진 게 언젯적 일이냐」)을 처절하게 자각하면서도 맞대면을 통해 나름의 혁명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가난해서 성자가 되는 길을 나는 모른다/ 겨우내 허공 가득히 써놓은 눈발의 언어를/ 끝내 읽지 못한 것이다/ 내 꿈은 은행 빚을 탕감 받는 게 아니라/ 이 비루함을 더 큰 비루함으로 완성하는 것,/ 그게 혼자 끙끙대는 혁명이다”(「쇳소리).

아마 ‘혼자 끙끙대는 혁명’에 근거하지 못한다면 어떤 위대한 혁명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풀잎이 들려주는 목소리가/ 혁명의 노래야”(「낮은 목소리」)라는 진술이 감동을 자아내는 까닭은 바로 그러한 각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청춘의 불로 지진 사랑이/ 식지 않은 분화구가 되어/ 더러는 아픔을 빛나게 증명하듯/ 사는 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아프고 아파서 아픔이 웃을 때까지/ 천천히 가는 길이다”(「아픈 세상」)라는 진술이 한낱 말장난으로 전락하지 않는 까닭은 “무명이 백광(白光)을 품고 있다// 바람도 함성도/ 모두 무명의 가늠할 수 없는 힘이 만든다”(「무명」)라는 전회(轉回)의 가능성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목에서 『패배는 나의 힘』이라는 제목이 함의하는 바는 분명해진다. 좋은 시집이 그러하듯 『패배는 나의 힘』은 시 작품을 한 편, 한 편 오롯하게 읽어나가야 제 맛을 전달할 수 있는 시집이다. 분량의 한계로 이렇게밖에 못쓸 경우 평론가 됨의 답답함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