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 느즈막에 학교 앞에 도서파격 장이 열렸다. 가설 판매대를 건너다니며 책구경을 하던 시간도 좋았지만 부수적으로 팔고 있는 각양각생의 책갈피에 마음이 꽂혔다. 자연히 책을 좋아하는 몇 몇 지인들에게 선물하리라 몇 개를 집어들고 신이 났었다. 엔티크풍으로 맘에 쏙 들어 여기저기 나눠주고 내 것으로 겨우 한개를 챙겼다. 일반 책에 맞는 크기인 줄 알았더니 대학노트용에 맞춰진 터라 자칫 줄이 꼬여 걸핏하면 매듭을 푸느라 낑낑대곤 했다.

 

한 달 전쯤에 꼬여든 매듭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손길을 다 동원해도 풀어지지 않아서 내동댕이쳐 버렸다. 최근의 내 심적 상태와 어쩜 그리 닮아있는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 한 해 공염불에 마음과 시간과 돈을 다 써버리느라 핍진한 상태에서 과부하가 걸린 영혼은 쉬이 회복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탈진 상태로 위축되고 자신감을 상실해가서 생애 처음으로 열정없는 시간들을 흘러 보내고 있었다. 일체의 감정 상태를 다스릴 수 있었던 책읽기조차 안 되어서 스스로 어이가 없는 상황.

 

지인들의 입소문으로 자주 회자되던 김성희 저자의 '나는 어제보다 오늘이 좋다'를 진작에 사고팠으나 절판이 되어 있어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는 줄 알았더니 개정판으로 단장했단 소식을 접하고 당장 구매했다. 나이 50에 옥스퍼드 대학원으로 다시 공부를 하러 떠났으며 '보이스 프롭 옥스퍼드'라는 지식 공유의 채널을 옥스퍼드 대학 총장에게 제안하여 세계 유수 석학들의 지적 향연을 일반 대중들이 맘껏 향유하게 해준 당찬 여인.그녀를 만나야 했다. 그녀를......

 

"더 이상 버킷리스트를 쓰지 마세요, 대신 당신의 오늘을 버킷리스트로 만들어 보세요."

겉 표지 첫마디에서 나는 한 방 먹었다. 난 이제껏 버킷리스트라곤 써 본 일이 없어서 꼬였나 싶어 바야흐로 지금에나 쓰려던 중이었단 말이에요. 내 첫 질문은 항변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대단하고도 거창한 세계적 석학들의 입을 빌어 책 속 어디에서건 얘기하고 있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계획한다고 되더냐고, 거창한 계획에 짓눌려 압박감에 시달리지 말라고...... 지금 당장의 오늘의 일을, 네가 지금껏 해오던 그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그것부터 실행하는 거. 성공 이념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 모두에게 화려하진 않아도 찬란한 인생을 살아봄직 하지 않겠느냐고, 실패의 잔근육 하나하나가 가진 참된 의미를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멋진 선택일 수 있다고......

 

미국에 외따로 떨어져있는 아들이 어제 드디어 외로움을 호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토로해왔다. 관계의 어려움에 대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더럭 겁이 나고 자신감이 형편없이 떨어진 아이는 아주 심각해져 있었다. 아이에게 씩씩한 척 내색 않았으나 나 역시 살면서 일체의 열정과 흥을 잃어버린 동굴에 갇혀 있던 상태라 아이의 심정이 철저하게 이입이 되었다. 하마터면 내가 울먹이며 가슴이라도 치고 싶었다.

 

아이랑 얘기를 나누는 중에 당장 날아가서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한없이 관대해져서 지키지 못할 약속들을 남발할 뻔도 했다. 그녀는 인생이란 여행을 떠난 자가 어찌 자기 등에 배낭 하나 메지 않을 수 있느냐고 가방도 스스로 싸야 하고 그 가방에 담을 물건도 스스로 사야하는 거라고 좀 더 대범하게 아이를 바라보라고 위로해준다.

 

'사람은 많이 넘어질수록 면역력이 생긴다. 불행을 많이 겪을수록 운이 좋다고 생각해야 한다......중략.......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냥 오는 시련은 없다. 큰 고비나 시련을 겪은 후에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부족한 걸 깨닫고 노력하라는 메시지였음을 뒤늦게서야 느끼곤 한다.'(229쪽) 그래, 아이는 이제 수없이 넘어져야 하고 제 발로 털고 일어서기도 해야 할 일 아닌가?

 

인간이 외로운 이유는 사랑받지 못해서인데, 타인이 주는 사랑만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주는 사랑이 없어도 안 된다. 나는 확실히 나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았기에 지금이 힘들어져 있나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하루하루 충실히 주어진 일을 책임을 다하고 타인의 신망도 얻었고 여전히 일을 하는 여건에 있으니 감사할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이들어 간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인생의 전환점을 멋지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초조함이 고스란히 드러나왔다. 

 

사소하고 평범하나 위대했던 나의 근간들을 돌보지 않고 뭔가 새로운 것을 기웃대며 사상누각을 지으려 했다. 고속 엘레베이터 설명서를 찾아 헤매고 다녔지만 어디에고 친절한 해답지는 없었다. 그러나 낙담할 일도 아니라고 작가는 또 말한다. 그렇게 헤매고 다닌 그 순간순간, 그 사람들, 그 공간이 또 다시 필요한 과정이었음을, 사소한 그것이 다시 무엇을 몰고 올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몇 번을 돌려서 읽고 되씹었다. 은퇴한 노장들의 뻔한 훈수로 채워졌을 거라 생각한다면 심각한 오해다. 그녀는 60이 넘어 옥스퍼드 대학 내 댄스대회에 참가하여 네 종목 금메달을 획득한 청춘이다. 금메달을 따 보리라던 욕심을 버리고 춤 자체를 즐기고서야  금메달이 주어지는 역설! 착오와 반전이 난무하는 인생이란 무대에서 스탭이 엉키지 않으려면 그저 지금의 소소하지만 충실한 내 한 걸음 한 걸음을 귀히 여길 일이다.

 

옥스퍼드 지식 전도사인 그녀가 교유하고 있는 숱한 세계의 석학들은 하나같이 가장 평범하고 쉬운 말과 실천으로 그 위대함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 고수들은 결코 어렵게 풀어가지 않는다. 언제나 단순하게 지금 다음 순간의 꿈만 꾼다. 딸아이에게 해줄 요리 생각에 행복해지는 입가에 미소를 달게 되는 그런 꿈......

 

반면, 지금 우리 이 땅에서는 '성공''꿈''희망'을 향해 달리는 동기부여 강연이 난무하며 지독한 스킬만 강조하는 한 편이 존재하기에 다시 소통 불능의 악순환을 해소하려는 소통 강연도 넘치고 넘쳐난다. 그들이 말하는 화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곤조곤 알려주는 삶의 지혜들은 가볍지 않고 현란하지 않아 외려 안심이 된다.

 

그래, 나 잘 하고 있던 거였구나. 시류에 휩쓸릴 이유가 없었는데 자기 확신이 부족했다. 이제 용기가 다시 생겨난다. 약속도 귀히 여겨 잘 지키려 애쓰고 타인을 향한 문은 언제나 활짝 열어 더불어 살아오지 않았던가?

 

다만 남의 방문을 노크하는 일, 손 내밀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그 문지방을 넘는 일을 감히 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이제 그녀의 격려를 받은 나는 일어서기만 하면 될 일이다. 엉켜있던 책갈피가 풀린 듯하다. 각자도생, 자신에게 맞는 빛깔을 찾아야 할 일이다. 나다이 지금 이 순간, 어제보다 성장한 모습으로...... 

 

저자의 사유를 따르노라면 헨리 데이빗 소로의 숲속 오솔길을 걷는 듯 편안했다가, 스무살 생생한 처녀의 날 것 그대로의 생기로 세상에 불가능할 일이 없을 듯한 패기도 느끼게 된다. 영국의 꼿꼿한 정신과 인간을 향한 경외와 성숙한 옥스퍼드의 문화를 간접 체험하게 되는 보너스까지 마음껏 누려보라 일독을 권한다. 결국 잠 못 들고 날을 하얗게 지새웠다. 어딘가 형편없이 구겨져 있던 내 '열정'이 어느새 불씨를 돋운다.

 

'나도 어제보다 오늘이 좋다......' 

옥스퍼드지식전도사, 보이스포럼옥스퍼드, 지금,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