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없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백합의 꽃말은 순수한 사랑, 순결, 희생이다. 그런데 책은 아이러니하게 흑(黑)백합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백합의 순수함이 검은색으로 물든 다는 것일까? 아니면 백합이 지닌 이면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일까? 처음단계인 책 제목으로 내용을 파악해 보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1952년 여름, 도쿄에 사는 중학생 소년 스스무는 방학을 맞아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아사기 아저씨의 초대로 가족과 떨어져서 홀로 롯코 산에 있는 별장(사실 오두막집에 가까운)에 가게 된다. 아사기 아저씨의 아들인 동갑내기 카즈히코와 함께 다음 날 표주박 연못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을 ’연못의 요정’이라고 소개하는 소녀 카오루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세 아이들의 미묘한 풋사랑이 시작된다. 

1935년 늦가을, 아사기(카즈히코 父)와 테라모토(스스무父)는 코시바 회장을 모시고 사업차 베를린에 있을 때 서늘하게 아름다운 그녀 아이다 마치코를 만났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누군가와 만나기로 했지만, 늦는 다는 그의 편지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되고 그 사이에 그들과의 우연찮은 만남으로 몇번 더 얼굴을 보고 말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에서 오기로 한 그 사람이 오지않게되어 그들보다 빨리 귀국을 하게 된다. 

1941~1945년, 16살 쿠라사와 히토미(카오루의 고모)는 호큐전철에 근무하고 있던 신야에게 연애편지를 써 교제를 하기 시작했다. 신야는 유부녀와도 만나고 있었고 히토미도 성인이 되면 현실에 맞는 배우자를 찾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이 일본에 전쟁이 발발했음에도 신야와 히토미의 교제는 계속되었다. 히토미의 오빠들은 좀 더 부유한 남성이 히토미와 결혼하기를 바랬기에 신야가 탐탁지 않아 어느날 그를 찾아가게 된다. 

흑백합에 나오는 세아이들 스스무와 카츠히코, 카오루를 보면 깨뜨리기 싫은 순순함을 보고 있는 듯 하였다. 카오루를 보며 사랑스러움을 느끼고, 꽃을 꺽어 그녀의 머리에 꽃아주면 너무 이쁠 것 같았고, 서로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늘 만나고 싶어 하는 세 아이들은 미묘한 관계 속에서도 예의가 있었고, 우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아마 이들이 순수함을 대명사인 백합이 아닐까 싶다. 반면 어른 들은 불륜을 저지르고, 물건이든 사람이든 마음이 변하면 쉽게 버리며, 사람을 속이고, 사람을 죽이면서도 정당방위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그 비밀을 무기삼아 돈을 갈취하려는 매우 추잡한 어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이런 어른들의 모습이 검게 물든 흑백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순수한 백합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아이들의 관계를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 성장소설, 청춘소설 이라고 한다면 어른 들의 모습은 마치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각자의 비밀을 감추고 살아가는, 그 비밀이 밝혀지지 않는 미스테리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 소개에서도 말하듯이 흑백합은 순수문학과 추리문학의 만남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순수문학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추리라고 하기에는 뭔가 미흡하며, 함께 추리하며 따라가는 느낌을 가질 수는 없었다. 다만 아쉬움 속에서도 마지막 장면에서는 ’응? 뭐지?’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앞을 들춰보며, ’이거였구나, 이런 관계였구나...’라는 것에 약간 뒷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흑백합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장면묘사였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일본의 롯코 산 경관이 머리 속으로 그려지는 듯 했고, 1940년대의 일본전쟁으로 인한 도시의 모습 또한 이상하리 만치 머리 속에 너무 잘 그려져 읽는 내내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하였다.  

책의 초반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그늘 없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27p).’ 그렇다면 더욱 더 순수함을 지키려는 노력이, 그늘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