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뮈소 <종이 여자>

 

p.9

책이 좋아 작가의 인생에 관심을 갖는 것은

푸아그라가 좋아 오리에 관심을 갖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마가렛 애트우드

 

p.76

"어렵게 설명할 것 없이, 그냥 떨어졌어요."

"떨어지다니, 어디서요?"

"어디긴 어디겠어요? 당신이 쓴 책에서죠."

그녀가 횡설수설 지껄이는 말들을 단 한 마디도 이해 못한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이 쓴 미완성 문장 한가운데서,

그러니까 행의 중간쯤에서 딱 떨어졌다니까요."

그녀가 좀 더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점심 때 밀로가 주고 간 책이 올려져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내가 잠자코 있자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직접 책을 들고 와 내 눈앞에서 266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나는 하루 사이 두 번씩이나

허리가 뚝 끊긴 내 소설 속 문장을 접하게 되는 셈이었다.

 

빌리는 마스카라가 시커멓게 번진 눈을 연신 쓱쓱 닦았다.

"제발, 잭, 이렇게 가버릴 수는 없어."

하지만 남자는 이미 외투까지 걸치고 있었다.

그는 내연녀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녀가 남자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제발!"

그가 그녀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그녀는 바닥에 나가떨어지면서

 

"봐요, 여기에 '떨어지면서'라고 써 있잖아요.

그 결과 내가 당신 집에 떨어진 거라니까요." 

 

p.100

사실 내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주인공들에 대한 정보는

실제로 확보하고 있는 정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내 '영웅들'과 완벽한 공감대를 이루기 위해

나는 등장인물마다 약 20페이지에 이르는

상세한 인물정보 파일을 만들어 두고 있었다.

생년월일부터 좋아하는 노래, 유치원 시절 선생님 이름까지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파일에 저장해두고자 했다.

막상 출간된 소설에는 내가 준비한 인물정보에서

사분의 일 정도만 나올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물밑 작업이 있기에

글쓰기라는 연금술이 가능한 것이리라. 나는 그런 사전 작업들 덕분에

내 소설의 주인공들이 현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라 믿고 있다.

독자들이 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감정이입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p.184

젠장.

창작력의 부재. 작가의 백지 공포증.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영감의 부재 따위는 폼을 잡고 글을 쓰는 인텔리들한테나 일어나는 일이지

열 살 때부터 머릿속으로 온갖 이야기를 지어내며 살아온

나같은 픽션 중독자와는 무관한 일이라 여겼다.

창작에 필요한 영감의 매개인 절망감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면

그런 상황을 일부러 만드는 예술가들도 더러 있긴 하다.

가끔은 자신이 겪은 슬픔과 방황을 창작을 위한 디딤돌로 삼는

예술가들도 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에바 가드너와 헤어지고 나서

<아임 어 풀 투 원트 유 I'm a Fool To Want You>를 작곡했다.

아폴리네르는 마리 로랑생과 결별한 후 

시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를 썼다.

스티븐킹도 <<샤이닝 The Shining>>을 집필할 때

술과 마약의 힘을 빌렸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들처럼 위대한 예술가는 못 되지만 나는 지금껏 글을 쓰기 위해

흥분제를 필요로 한 적은 없었다.

몇 년 동안 끓어오르는 상상력의 분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휴일을 잊은 채 밤낮으로 글을 썼다. 마치 오랫동안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일종의 트랜스 상태로 나만의 세계에서 살았다.

그 축복받은 시간 동안 글쓰기는 내게 어떤 콜라 맛보다 상큼하고

황홀했고, 그 어떤 만취 상태보다 더욱 기분이 고양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 지난 일이 돼버렸다. 옛날 일이.

나는 글쓰기를 포기했고, 글도 나를 버렸다.

 

p.235

사람은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걸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정확하게 갖다 주기 위해 사람과 사물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을 만든다.

그 분은 하늘에 계신 창조자이며

그 은총의 순간은 모두 그 분이 계획한 것이다.

 

p.254

처음 만난 몇 달 동안 우리는 사랑의 최절정을 경험하며

오만한 행복에 젖어들었다.

시간이 멎고, 산소가 넘쳐나고, 현기증으로 아찔한 순간들이었다.

물론 나는 행복에는 어느 정도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내가 존경하는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던진 숱한 경고의 메시지들을

강단에 서서 문학을 가르친 내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스탕달과 그의 결정(結晶) 작용

(다이아몬드와 똑같은 결정 구조를 가진 암염을 캐는 채굴장에서는

어떤 물체든 소금의 결정으로 덮여 다이아몬드와 같은 빛을 낸다.

이런 원리에 빗대어 스탕달이 연애 초기 무조건 상대를 미화해서 보려는

남성의 심리 상태를 지적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 : 옮긴이),

톨스토이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철길로 뛰어든 안나 카레니나,

에테르 중독자가 되어 호텔방에서 처참한 고독을 견디다 못해

필연적인 파국을 맞는 <<영주의 여자>>의 두 연인 '아리안느와 솔랄'.

하지만 열정은 마약 같은 것이다.

파멸을 부른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일단 그 감정의 굴레에 한번 빠져들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다.

나는 오로르와 함께 해야만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완벽해진다는

착각에 빠져 우리 사랑은 영원할 거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실패해도 우리는 사랑을 지켜낼 거라 자만했다.

하지만 오로르는 내 장점을 부각시켜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내가 혐오해 마지않던, 내가 오랫동안

극복하려고 부단히 애써 왔던 내 결점들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독점욕, 미에 대한 강한 집착,

천사 같은 외모 뒤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영혼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망상,

이런 눈부신 여자와 사귄다는 사실이 내가 다른 다른 남자와

다르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여기는 자아도취적 자긍심.

 

-----------------------------------------------------------

 

작가의 이름과 그가 낸 모든 책의 제목이 굉장히 유명해서

한번쯤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는데

책이 너무 두꺼워서(?) 감히 엄두도 내지 못 하고 있다가 

8월의 첫날도 다가오고 해서 야심차게 스타트~!

<구해줘>부터 읽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종이 여자>

 

실연의 상처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버린 베스트셀러 작가 톰 보이드에게

책 속의 여자주인공 "빌리"가 미완성 문장의 한가운데서,

그러니까 행의 중간쯤에서 딱 떨어졌다

그를 구해내기 위해서? 아니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수다스럽고 까다롭지만 호기심 많고 생기 넘치는 빌리는

사사건건 그와 부딪히지만 결국 협상에 성공하고

(실연당한 그녀와 그를 다시 맺어주는 대신 소설의 결말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나쁜남자지만-와 해피엔딩으로 해줄 것)

어쩌다보니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도 하지만

목표 달성 후 자신이 있었던 곳 즉, 소설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판타지

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ㅋㅋ

 

이 작품은 캐릭터 공부를 하는 데 보면 좋을 것 같다

등장인물마다 20페이지 이상 인물정보 파일을 작성해서 그런가

빌리를 비롯해 톰 보이드, 톰의 친구 캐롤과 밀로

그 외 잠깐이라도 책을 만졌던 사람의 외양과 과거와 사랑관 따위가

마구마구 들어가 있어서 이렇게 방대한 양이 되지 않았나 싶다

책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는 설정은

처음엔 책이 어떻게 될까봐 조바심 나고 걱정됐는데

너무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다보니 좀 긴데? 하는 느낌이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았는데 몇 명은 생략해도 될 것 같았다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유쾌하고 재밌는 이야기였고

마지막 반전도 맘에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