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아 <나를 위해 웃다>

 

p.12

노파는 한결같이 엄마를 내버려두렀다.

엄마는 사는 게 너무 싱거워서 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같은 자리에서 밥상을 세 번 마주하고 나면 해가 저물었다.

엄마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 자라기를 계속 했다.

깡마른 팔과 다리는 물오른 나뭇가지처럼 쑥쑥 늘어났다.

다섯 살짜리가 열세 살짜리 옷을 입는데도 노파는 별말이 없었다.

밤이면 뼈가 자라는 소리가 들릴 만큼 쉼 없이 키가 컸다.

엄마는 자신의 팔과 다리가 벽을 뚫고 나가

노파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는 상상을 하며 어둠속에서 잠들었다.

 

p.32

나빴던 일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엄마는 헤어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것은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꿈속에서 엄마는 자신의 몸이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뭔가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 폭신하며 향긋한 느낌이 밀려왔다.

그것은 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엄마를 가득 채웠던 성장이었다.

- 나를 위해 웃다

 

p.46

행운을 부르는 의식이라면, 나에게도

사장 할머니의 유리창처럼 매일 닦고 또 닦는 것이 하나 있다.

언젠가 옷가게를 차리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천으로 된 원피스와 티셔츠를 한가득 걸어놓고

그 사이를 걸어다니는 상상을 해본다.

입구에는 구슬로 엮은 모빌을 걸어놓고

환한 조명도 곳곳에 달아둘 것이다.

가게의 평수, 인테리어, 벽지 색깔, 마네킹의 포즈까지

수도 없이 그림을 그려봐서

옷걸이 몇개가 어디에 걸려야 하는지도 정확히 떠올릴 수 있다.

반복해서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손님을 받는 일이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지금 하는 일이 아주 뜨거운 징검다리처럼 여겨진다.

맨발로 그것들을 딛고 가는 건 몹시 힘든 일이지만

다리라는 걸 잊지 않으면 된다.

'저쪽 뭍에 닿을 때까지만'이라고. - 아프리카

 

p.98

교육대학원은 입시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온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 셋째까지 낳고 온 주부들,

트럭으로 세계여행을 하고 온 아저씨,

한복집을 한다는 할머니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교사자격증이 유행인 것 같았다.

"선생만한 게 없지."

그래도 사회를 겪어보고 돌아온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때는

왠지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퇴근 후에는 그림이나 악기를 배우러 다니고,

방학에는 긴 여행을 가는 삶'을 생각하면

아르바이트도 한결 견디기 쉬워졌다.

 

p.120

"서울의 밤은 이상해요."

미지근한 보온병을 붙잡고서 그녀가 말했다.

"불빛이 꺼지질 않아서, 기대를 버릴 수가 없어요."

아버지는 말없이 앞을 보고 있었따.

집에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졸음을 느꼈다.

오늘은 충분히 먼 길을 달려 제자리에 돌아왔으니

자전거를 타지 않아도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밤 내내, 먼 나라의 차 향기가 그녀를 감싸안았다. - 마테의 맛

 

p.154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내 성적은 시원치가 않았고,

동생은 뜻밖에도 수재였다.

엄마는 살이 빠지지 않았지만 별로 괘념치 않았다.

아버지는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아파트의 경비직과 택시 운전, 구두 수선 같은 일들이

차선책으로 떠올랐지만 아버지는 그런 일들을 하기에는

너무, 섬세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전화판매 일을 시작하자

우리는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이건 너무 절망적인 게 아닌가 싶을 때마다 동생이 전교 일등을 했다.

우리는 꿈꾸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살아갔다.

매일 아침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시디를 틀었다.

초라하고 복잡한 살림으로 가득 찬 열두 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미뉴에트의 선율은 늘 조금 어색하게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가벼운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면서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베란다의 창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열린 창 앞에서 눈을 감고 깊은 숨을 쉬는 것은

아버지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일어나요, 일어나."

아버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의 잠을 깨웠다.

'강요는 아니야.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겠지.

하지만 햇살이 이렇게 따뜻하게 비치는걸' 같은 식이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배우의 저음처럼 멋진 데가 있어서

그건 또하나의 자장가가 되어 오히려 잠을 부르고는 했다.

그래서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 아버지는 할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동생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아 있곤 했으므로

언제나 늑장을 부리는 사람은 엄마와 나뿐이었다.

 

p.158

아버지는 묵묵히 밥을 먹는 동생에게 국을 한 그릇 더 떠주고

안방으로 가서 밤색 머플러를 꺼내왔다.

지난 엄마 생일에 아버지가 선물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스카프를 엄마의 목에 둘러줬다.

엄마는 좀 불편하다는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동생이 학교로,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로 나설 때면

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현관으로 나왔다.

엄마는 언제나 뒤늦게 허둥대면서 우리를 따라나왔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매일매일 용돈을 줬다.

나는 그게 언제나 부족했고, 동생은 한 푼도 쓰지 않아 쌓이는 편이었고,

엄마는 돈을 남겨 과일이나 간식을 사왔다.

우리집의 가난은 교묘해서 위장하려면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지만

정작 그 안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항아리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간혹 더욱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p.159

낮에는 오가는 손님이 없어 늘 혼자 가게를 지켰다.

나는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며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해가 쨍 빛나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움직이고,

붉게 노을이 지고,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는 장면들.

생각해보면 꼭 그만큼이 내 이십대의 값인 것 같았다. - 댄스댄스

 

p.226

그는 막을 통과하려는 사람처럼 내 몸을 밀어붙였다.

행위가 끝나고 나면 내 몸에 봉제선이 남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로의 뺨이 부딪힐 때 그는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그는 아프지 않게 내 어깨를 물었다.

가슬가슬하게 마른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주 작은 배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처음부터 그곳에 가고 싶었던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뒤척이다 눈을 뜬 다음날이면 더욱 귓가가 먹먹해졌다. - 휴일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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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아 작가는 나랑 같은 나이라

내가 항상 주목하고 있다 ㅋㅋ

이번 단편집은 몇 개는 재미있고 몇 개는 그냥 그랬는데

재미있게 읽은 건 전부 가족 얘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문학동네 수상작 <달의 바다>를 봐도 그렇고 (고모 얘기)

아무래도 그녀의 강점은 "가족 스토리" 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보니 작가는 "삼대가 북적이며 살아"왔단다

또한 그녀는 따뜻한 감수성으로 그것을 풀어낼 줄 안다

이것이 정한아 작품의 매력이다

따뜻함과 평온함, 나에게는 부족한 점이라 더더욱 부럽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좀더 고요히, 잠잠히 글을 쓰겠다고 했다

지금, 그녀의 글은 그렇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중에 내가 작가가 되면,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