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p.10

남자애와의 데이트가 대부분 그렇듯

오늘도 베니건스에서 샐러드와 파스타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나니 특별히 갈 곳이 없었다.

상우가 "비디오방이나 갈래?" 했을 때

나는 "글쎄......"하며 얼버무렸지만

결국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얌전히 앉아 비디오를 보던 그애가

입술을 부딪쳐왔을 때 나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키스할 때 눈을 뜨는 건, 나 바람둥이야, 라고 광고하는 일이다.

그러나 첫 키스에서 여자가 너무 적극적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새침한 척, 입술을 아주 약간만 벌려주었다.

상우의 입맞춤은 능수능란했다.

민석이처럼 무작정 냄새나는 혓바닥을 쑥 밀고 들어오지도 않았고,

승재 오빠처럼 (1) 상대의 입술을 벌린다; (2) 혀를 집어넣는다;

(3) 서너 차례 회전시킨 다음 상대의 혀를 핥기 시작한다, 는 식의

매뉴얼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변죽만 울리다 말지도 않았다.

상우의 입술은 뭐랄까, 우유에 적신 스펀지케이크처럼

촉촉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적당한 완력마저 느껴졌다.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상우가 혀를 움직이기 좋도록

입술을 조금 더 크게 벌려주었다.

 

p.20

내 인생, 엄마처럼 사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스스로 중산층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허울만 좋은 중소기업 임원의 아내로,

이십몇 년 결혼 생활 동안 백화점 세일 때 허접한 옷 골라 사고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다닐 수 있게 된 걸 생활의 여유라고 생각하는,

쉰 살 다 된 여자의 인생을 떠올리면 정신이 바짝들곤 했다.

나를 임신하지 않고 아빠 같은 남자와 서둘러 결혼하지 않았다면

엄마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 낭만적 사랑과 사회

 

p.81

잠결에 아랫배가 와락와락 아파 눈을 떴더니

우당탕탕 한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 씨, 요즘 좀 잠잠하다 했더니 또 시작이었다.

초장부터 불을 뿜어대는 화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써보았지만

하이 소프라노로 질러대는 아빠 목소리가 생생한 화음을 이루어

귓가에 스테레오로 울려 퍼졌다.

남들 다 자는 이 새벽에 얼굴들도 두꺼웠다.

 

p.86

약 한 달 전 그들, 그러니까 우리 아빠

K대 사회학과 부교수 45세 김용진 씨(대화명: 슬픈 늑대)와

고졸 백조 20세 조영미 양(대화명: 깜찍이)은

모 인터넷 채팅 전문 사이트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둘이 번개에서 만나는 순간 번개처럼! 불꽃이 파바박 튀었다.

둘은 나이와 직업과 처지의 장벽을 모두 뛰어넘어

영화처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깜찍이는 슬픈 늑대의 처자식을 떠올리며

몇 번이나 관계를 청산하려 애써보았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둘의 사랑은 그야말로 하늘만이 허락한

아주 특별하고 고귀한 사랑이라고,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고,

슬픈 늑대가 눈물로 치맛자락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망할......)

그러다 깜찍이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임신이 의심되는 증세 앞에서

슬픈 늑대는 별안간 깜찍이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원래 귀찮으면 바로 쌩까는 게 그 사람 특기다.)

한술 더 떠 슬픈 늑대는 그 뱃속의 애가

누구 씨앗인지 알게 뭐냐고 뻔뻔하게 큰소리까지 쳤다.

('씨앗'이라니, 십대 소녀인 내가 듣기엔

상당히 원색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슬픈 늑대의 의심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깜찍이는 그동안 전남자친구 (채팅에서 만난 서른두 살의 백수였단다) 및

그 전전남자친구(오다 가다 만난 동갑의 재수생이었단다)와

'어쩔 수 없이' 몇 번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뱃속의 애가 그들의 '씨앗'이라는 건 죽어도 아니었다.

맹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슬픈 늑대 오빠는

깜찍이의 변명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도리어 부정한 여자 취급하며 이별을 통보했다.

그리고 다음날, 웬 여자애(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다.

이 무슨 쌍팔년도 삼류 드라마 같은,

초(超)저질 통속 스토리란 말이냐.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그 뱃속의 애는 내 동생이 되는 거였다. - 소녀 시대

 

p.150

어머니들의 관심은 보다 현실적인 데 있었다.

아들 여자친구의 조건과 며느릿감의 조건은 엄연히 달랐다.

딸 남자친구의 조건과 사윗감의 조건이 같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남자의 어머니는 장래 며느릿감의 면면에 대해

새삼 곰곰이 따져보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남 앞에 내세울 만한 장점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내 섭섭해졌다. 자그마한 체격이나 오종종한 이목구비는 그렇다 쳐도,

어쩌다 마주칠 때 별말 없이 목례나 할 뿐

사근사근하게 감겨오는 애교가 없는 점이 불만스러웠다.

비서라는 직업도 시답잖았다.

공무원이나 교사처럼 안정적이지도 않았고

뾰족하게 돈을 많이 벌어올 성싶지도 않았다.

바야흐로 남녀가 평등한 시절이었다.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제 아들 혼자 뼈 빠지게

처자식을 부양하는 광경을 상상하자니 입맛이 썼다.

그렇다고 결혼 반대를 전격 표방하고 나서자니

아무래도 명분이 부족했다.

하긴 내 욕심 차리자고 남의 딸자식 인생을

끈 떨어진 갓으로 만들 순 없지.

남자의 어머니는 결국 자신처럼 선량하며 배려 깊은 시어머니는

다시없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처음부터 다잡아야 해! 남자 어머니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자 어머니 역시 장래 사윗감이 전적으로 미더운 건 아니었다.

이건 아무리 헤아려봐도 도무지 뭐 하나 비범한 구석이 없는 거였다.

주변에 하나둘씩 혼사가 늘어가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지지리 못해 부모 속깨나 태우던 옆집 딸내미는

일찌감치 의대생을 꽉 잡아 단숨에 의사 사모가 돼버렸다.

인생 대역전이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 해도 적당한 앙혼(仰婚)이

여자에게 흉될 리 만무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착해빠진 딸이

제 성정대로 연애도 너무 소박하게 했다는 미련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사윗감이 인물이 훤한가, 붙임성이 있나,

결정적으로 장남이 아니기를 한가.

헤아려보면 폭 한숨이 나왔다.

그냥 저냥 평범한 게 제일이지, 뭐.

남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면서

여자의 어머니는 결연히 읊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귀한 우리 딸 눈에 눈물나게만 해봐라!

 

p.161

여자가 꿈꿔온 결혼 생활은 또래 집단 평균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흰 프릴이 달린 커튼, 앙증맞은 이인용 식탁,

32인치 완전 평면 텔레비전, 세피아 톤으로 현상한 결혼 액자.

그리고 자유! 귀가 걱정 없이 심야 영화를 관람할 자유,

부모에게 둘러댈 필요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 갈 자유,

국에 밥을 말아먹든 밥에 국을 말아먹든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자유.

결혼에 대한 여자의 소박한 기대는 진정으로 그게 다였다.

그런데 남자는 지금 여자의 꿈을 와장창 박살내는 발언을

저토록 무신경하게 툭 뱉어내고 만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먹던 자장면을 입 안에 마저 처넣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절망과 분노는 깊디 깊었다.

여자의 음성은 바들바들 떨리고 목덜미엔 푸르스름한 핏줄이 섰다.

수진: 오빠가,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너.

여자가 이렇게까지 히스테릭하게 나올 줄 몰랐던 남자는

엉겁결에 목청을 높였다.

재호: 야, 내가 뭐 어쨌다고 그래?

수진: 그걸 몰라서 물어? 어떻게......

        어떻게...... 같이 살자는 말이 나올 수가 있어?

재호: 에이 씨, 너 좀 심하다. 우리 부모님이 무슨 전염병 환자냐.

남자의 입술에 춘장 찌꺼기가 묻어 번들거렸다.

풍선을 빼앗긴 일곱 살짜리 아이처럼

여자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 홈드라마

 

p.210

십육 세, 인생의 정수, 청춘의 고갱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연실은 상수리나무 가지에서 저절로 툭, 떨어지는 햇도토리만치

야물찬 사람이 되리라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노력만 한다면 반드시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이십세기 모단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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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현대 여자 작가의 소설책을 주로 읽는다

백영옥, 정한아, 전아리, 김민서의 유쾌하고 발랄한 감성에

자극을 콕콕 받아 온몸이 쑤시곤 한다

그리고 이내 좌절... 왜 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ㅠ8ㅠ

모두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작품들이지만

이들 중 몇 작가의 작품은 기복이 있다

어떤 것은 너무 좋아 데굴데굴 구를만큼 기똥차지만

또 어떤 것은 그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것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이현은 한결같이 완벽하다

그녀를 문단에 나오게 한 첫 작품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최근의 장편 <너는 모른다>까지 무서우리만치 재밌다

어제는 이 책을 다 읽고 너무 좋았는지

꿈 속에서 정이현 작가랑 대담도 했다

 

특히 '홈드라마'란 단편은 결혼을 앞둔 남녀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렸는데 내가 요즘 쓰고 있는 이야기랑

닮아서 다시 우울해졌다

아, 왜 난 이런 대본 형식의 구성방식을 생각하지 못 했을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이란 표현은 이런 때 쓰는 걸까

어쨌거나 닥치고

정이현 찬양

얼굴도 오목조목 귀엽고 예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