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악의 싹은 언제나 커다란 사회의 물결 속에 있다"

 

미스테리 소설을 읽고 이토록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느낀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지 국내에서는 유명세가 없었고, 게다가 상당히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기에 거의 기대하지 않고 읽었던 터라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지금은 제2의 쇠망기라고 할까요? 솔직히 우리나라에 자동차, 전자, IT 등 많은 부분에 밀려 고전을 면치못하고 있는 일본이지만 현재도 여전히 그렇고 과거에는 더욱 그러했듯이 분명히 일본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경제대국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전쟁을 일으켰으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마치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진국인 것 마냥 콧대또한 무척이나 높았던 일본....하지만 그런 일본에도 이 책의 배경이 되었던 브라질 이민이라는 암울한 역사가 있었을 줄이야. 역사를 좋아해 이런 저런 역사책을 꽤 많이 뒤적거렸다 자부했지만 이러한 일본의 근대사를 이 미스테리 소설을 통해 처음 접했다는 것도 상당히 충격이었던게 사실입니다.

 

국익을 위해서,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기자신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 대다수 사람들의 행복과 재산 그리고 생명까지 훼손시켜버린 일본의 브라질 이민.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 사태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도 않고 반성하거나 사죄하지도 않습니다. 자기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는 궤변과 잘못된 신념만 있을 뿐입니다. 오직 남은 것이라고는 아픔과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분노와 자포자기 뿐....

 

이 사람들은 정부에 대해 분노하기 전에 순진하게 속아버려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망쳐버린 선택을 한 자기자신들에게 분노합니다. 그리고 하나둘씩 죽어가는 사람들, 비밀은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묻쳐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덮어버릴 수는 없는 법. 질병과 고통 속에 죽어간 수많은 이들을 위해 4명의 사람이 나섭니다. 각자가 모두 브라질 이민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가슴에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원인과 같은 결과로 가슴에 한을 품은 이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대담한 작전을 결행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과 함께 낯선 이국땅으로 왔다가 숨져간 동포들에게 단 한 마디의 말을 들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 "미안하다"는 말이죠. "우리가 잘못했다.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목적을 이뤄내어 자신들에게 멍에처럼 씌워진 일본과의 인연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조국은 일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그들을 버린 나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름부터가 무척이나 생소한 작가 <가키네 료스케>는 이 작품을 통해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오야부 하루히코상 등 일본의 권위있는 문학상을 휩쓸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작품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작가가 집필한 작품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작품에는 일본 미스테리 특유의 암울함이나 복잡함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상당히 재미있고 유머스러우면서도, 애잔하고 감동코드 또한 적절히 들어있습니다. 해설자 정태원님 말마따나 (상),(하) 2권으로 되어있지만 책 두권을 금방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감도 무척이나 빠릅니다.

 

특히 동양인과 브라질, 콜롬비아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스케일은 과거 일본 소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고, 특히 제가 좋아하는 본격추리소설과는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이나 차별화되는 작품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 들도 무척이나 선명합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거대한 사회의 물결 속에 자라난 거대한 악의 싹을 개개인의 힘으로 잘라버리기는 사실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토, 케이, 마쓰오, 야마모토. 이들 4명이 벌인 일 처럼 적어도 이것이 악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반성하게 함으로써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하는 효과는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벌인 행위는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 사회에 국익을 위해서라도 개개인의 삶을 파멸시켜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경고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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