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푸른숲

 

깨달으려면 아파야 하는데,
그게 남이든 자기 자신이든 아프려면 바라봐야 하고, 느껴야 하고, 이해해야했다.
그러고 보면 깨달음이 바탕이 되는 진정한 삶은 연민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연민은 이해 없이 존재하지 않고 이해는 관심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관심이다.

 

가슴이 너무나 아파…착한거, 그거 바보 같은 거 아니야.
가엾게 여기는 마음, 그거 무른 거 아니야.
남 때문에 우는 거, 자기가 잘못한 거 생각하면서 가슴 아픈 거,
그게 설사 감상이든 뭐든 그거 예쁘고 좋은 거야.
열심히 마음 주다가 상처 받는 거, 그거 창피한 거 아니야…
정말로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극복도 잘하는 법이야.
고모가 너보다 많이 살면서 깨달은 거는 그거야.

 

기다리는 것, 만남을 설레며 준비하는 것, 인간과 인간이 진짜 대화를 나눈다는 것,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 서로 가식없이 만난다는 것

 

 

인간에게는 누구나 공통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며 실은, 다정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한다는 것, 그 이외의 것은 모두가 분노로 뒤틀린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 그게 진짜라는 것

 

 

 

학교로 향하는 버스 안, 햇빛이 따뜻하게 창가로 스며드는 아침, 라디오에서 무미건조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연쇄성폭행범... 사형 " 평소 같으면, 아무 생각도 없었을 그 상황에 나는 나도 모르게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지난 밤에 반쯤 읽다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떠올라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류의 소설이 눈물 팔아 쓴 상업적 소설이다. 몇 년전에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던 <가시고시>나 <아버지>도 읽어봤지만, 나는 왜 그 소설들에 짜증이 났었는지 모르겠다. 슬퍼하고, 가슴 찡해져 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얻을게 없었다. 그땐 너무 어려서 였을지도 모르지만.

 

처음엔, 공지영씨는 참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의구심이 남았다. 눈물만 쏙 빼놓고... 덮어버리면 잊혀질까 하고. 여튼 집에와서 책을 다시 펼쳤을때 읽는 내내 눈물을 닦아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눈물이 자꾸 시야를 가로막아서 닦지 않으면 다음 문장을 읽을 수 없엇다. MP3를 껐다. 나도 모르게 엄마가 갑자기 방문을 열어 나는 소음에 화가 났다.

 

자꾸 마음이 너무 긁혔다. 피 한방울 나지 않았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 뿐 너무 아파서 끙끙 거리며 책을 읽었다. 보다못한 동생이 잔소리를 할 때까지, 나는 그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멋진 글귀야 누구나 만들 수 있는거고, 상처를 가진 인물쯤이야 누구나 만들 수 있었다. 나는 공지영씨의 글솜씨나 이 책의 스토리에 감동을 받은 게 아니었다. 우리 현실에, 현재에, 사회에 존재하는 '사실'에 놀랐고, 아팠고, 감동을 받았다.

 

누군가가 심장을 꺼내 1cm 쯤 옮겨 놓은것 같다. 책을 읽기전에는 여기에 존재했던 마음이 이제는 저기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다.

 

성당에 다니는 고모였던가... 누군가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교도소에 봉사활동을 가보면 느끼는건데.. 죄수들 보통 사람들이랑 똑같다고, 더 착하게 생겼더라고. 마치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그때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가난한 사람들에 연민을 느껴본 적은 있지만, 항상 신문이나 TV에서 극악무도한 살인자를 보며 욕을 퍼부어 대던 나였으니, 마치 이 소설의 주인공 문유정처럼.. 말이다.

 

약자와 강자란 너무 애매하다. 똑같은 사람이라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물리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방향만 틀어보면 어디에도 극단"이라는 것은 없는데.

 

사형수들은 정말 천사가 되어 죽는 것일까.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면서 변해가는 것일까. 남들은 평생 걸려도 이해하지, 깨닫지 못한 '죽음' 이라는 것을 하루하루 느껴가면서 오늘의 아침을 맞고 있을까.

손에 땀이났다. 눈물은 어느새 멈춰있는데, 심장은 아직 그대로였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 사형수 누나 아니에요 " 하는 구절에서는 웃어버렸다. 어쩌면 나라도... 꼭 그랬을것만 같아서.

 

너무 모르고 있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마치 달의 한쪽면만 볼 수 있는 무지한 지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이런 면이 존재한다는 것은, 나는 이십년하고도 하루 살면서 한번도 신문에서도 TV에서도 교과서에서도 본적이 없었다. 사형, 극형.. 을 처한다고 해서 죽은자가 돌아올까? 하고는 그날 아침 엄마와 이야기 했던 게 전부였다.

 

학대를 받은 사람은 공감이 부족하다고 쓰여있다. 다만 무감각해질 뿐이다. 내가 '사형'이라는 단어에 무감각 해지듯 그들도 아픔이란 단어에 무감각 해지는 것 같았다.

 

열다섯, 이라는 나이의 개념도 이상하게 인상 깊다. 상처입기 쉬운 15라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숫자... 그것에 박힌 상처를 십자가 처럼 지고 살아가면서, 사형수 윤수에게 공감을 느끼는 유정, 그녀는 변했고, 깨달아서 아파했다. 한때 자살까지 시도한 그녀가 그렇게 자기자신을 똑바로 보는데는 많은 길을 둘러왔지만, 어쨌든 그녀의 심장도 1cm 변화했다.

 

네살짜리 아이에게 천원을 빼앗기 위해 살인을 하고, 그 돈으로 빵을 사먹은 열살짜리 아이의 " 맛있었어요 " 라는 구절, 윤수의 <블루노트>와 오레스테스 이야기, 모니카 수녀의 이 세상 가장 심장을 두드리면 말들...

 

완벽히 기억에 남지 않지만, 모두 마음 한구석에 쌓여있다. 시뿌옇게 흐려진 눈 앞을 닦고 읽는 내내 고모따라서 교도소 봉사 가야지, 한번 가봐야지 라고 중얼거리다가, 마지막엔 그날 아침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뉴스를 장식한 그 사형수에게 이 책을 보낼까하고도 생각을 했다. 이러다 책을 덮고, 눈물이 마르고, 내 옆에 있는 휴지들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읽자마자 쓴 리뷰가 마침표를 찍고, 새벽 훨씬 지난 시간이자만 또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나는 살인자들에게 욕을 퍼부어 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장은 1cm 옮겨지지 않았었나. 마치 <뱀에게 피어싱>을 읽었을때의 그 느낌이다. 아주 판이하면서도, 뭔가 확실하게 변한 것에서는 공통적으로 같았다.

 

살살 달래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는 수녀의 말들에 나는 주인공도, 사형수도 아니면서 왜 고개를 숙였을까, 힘없이 그어놓은 책의 밑줄들을 다시 넘겨봐도 이젠 눈물이 나지 않는데, 사형을 기다리는 그 사형수에게 내 손으로 책을 건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도 영치금 천원으로 1년을 버티는 죄수라서 이 책을 화장실 용으로 써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모른다. 죽고 싶어했던 윤수가 마지막에는 염치없지만 살아있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또 어딘가에 있을거만 같고, 내일 10시에도 또 사형을 집행하고, 어디에선가는 강간, 살인이 벌어지고, 수녀님 신부님 스님들은 오늘도 사형수들을 만나 천사로 만들고... 위선에 치를 떠는 자가 위악을 행하고, 또 어디 한편에선 집행을 앞둔 교도관들이 술에 쩔어 있을지도.

 

사형을 폐지하자는 생각도, 무섭다는 생각도 아니다. 다만, 이전의 세상과 책을 덮은 후의 세상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 순간을...

 

하루의 아침을 가장 두려워 하는 그들을, 열다섯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마음이 가난한 부자들을, 정의와 동정심 사이에서 마음을 가르는 검사들을, 학대받고 사랑 받지 못해 누군가를 때리는 아이들을.... 나의 일 처럼 생각했던,

책을 읽는 순간 만큼은 정말 나의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공지영, 우리들의행복한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