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의 단편은 그의 장편과는 다르게 더욱더 깔끔하다. 적은 내용에 깊이있는 뒷맛이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지만, 한번 읽고 잊어버려도 상관없다. 하지만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 또 그 작품의 매력일거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작품은 여전히 무언가를 품고 있었고 기담"이라는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내용이 흥미롭다.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봤듯이 이 사람이 말하면 현실과 허구의 선이 투명해진다. 언제 그랬냐는듯, 그는 시치미를 떼고 묵묵히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고 시작되는 이야기가 어느새 내 일이 되고, 내가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우연이라는 것은 단조로운 일상이 유일하게 허락받는 세상의 이치 밖에 존재한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우연을 재밌어하고, 기묘한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귀신이야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그러한 우리의 심리를 파악하고, 마술을 부린다. 그가 지닌 박학다식함에 버무려진 기담은 정말 감쪽같이 우리를 속이지만 그 트릭에 갇히면서도 기분이 좋다. 플라토닉한 마조히즘이랄까.

하루키의 작품 중 나는 이러한 성격을 지닌 것들이 좋다. 물론 순문학부터 시작해서 사회문제를 바라본 작품들도 나쁘지 않지만 말이다. 나는 정말 할머니가 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기담 같은 종류의 것을 자연스럽게 쓸 수 없을 것 같다.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루키의 단편이 항상 가지고 싶은 무엇인가와도 같이 느껴질때가 많다. (그게 꼭 기묘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내가 존경하는 하루키는 항상 나를 부끄럽게 한다. 책 한권을 잃고나면 부끄러워서 한동안 다시 읽지 못하고, 또 다른 한권을 손에 잡고 단숨에 읽고나면 부끄러워서 리뷰를 쓰지 못하게 된다. 지금은 그의 작품을 어느정도 읽었기에 슬금슬금 간이 커져서 리뷰따위를 쓰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의 작품에 항상 등장하는 재즈를 비롯한 다양한 음악과 작품들, 그리고 여행지의 느낌에 늘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시절 도쿄에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뭐 그가 살아오면서 심취한게 여러가지였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변덕스럽게 이것저것 다 좋다고 난리치니까 말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그것을 눈꼽만큼 알고서 써먹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자꾸 나를 질책하는 듯하다. 좋아하는것과 전문가라는것은 분명 다른 뉘앙스지만, 하루키는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그 분야를 자신의 그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가벼운 예를 들어, 음악부터가 그러하다. (오죽하면 따로 그의 음악을 추출한 책이 있을 정도니까)

이야기가 샜지만, 어쨌든 하루키의 단편은 정말 닮고 싶은 특징이 있다. 그의 장편과 단편이 구분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얘기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그는 단편에 더욱더 많이 내놓는다. 이야기보따리가 단편에 펼쳐진다. 장편은 이야기에 흐름에 쫓겨가지만 단편은 바쁜 일상에 찾아온 주말의 여유처럼, 그렇게 눈부시다. 하루키는 그것은 가장 잘 요리하는 작가일지도 모른다. 무겁지 않은 그의 단편의 여유와 기담 한조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