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해설의 내용을 먼저 인용하자면, 이 소설은 리얼리티로 '재난 속 구원'이 아닌 '재난 속 인간본성의 탐구'라는 더욱 본질적인 테마를 다루고 있다. 재난이 질병이라는 데서 최근 개봉한 영화 <감기>와도 비슷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휴머니티에서 끝나지 않기에...

가상도시 화양에 일어난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대재앙을 사건화하고 있는 소설에서 '빨간눈 괴질'이라는 원인불명의 전염병은 눈과 안개처럼 흔적을 지우고 은밀하게 퍼지는 무차별적 전염력을 보여주며 치사율이 100%에 가깝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은밀한 병의 손길 속에서 무력한 인간, 공포에 질린 인간, 직업적 사명감을 지니고 있는 인간, 인간애를 넘어서 생명존중을 그리는 인간 등 다양한 인간들이 등장하고 있다.

트위터를 통해서 등장인물에게 정 주지 말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이 들면 들수록 가슴이 먹먹한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소설이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간의 모습에 뼈저린 반성을 하면서, 나 역시 '구제역'을 대수롭지 않게 보지 않았던가, 반려견이 있다면 저 상황에서 과연 끌어안고 살 수 있겠는가를 반문해 보게 되었다. 소설 전체를 꿰뚫는 서재형은 알래스카에서 개썰매팀 '쉬차'를 끌고 경주를 하던 중 '화이트 아웃'을 만나고 굶주린 회색 늑대 무리를 만나면서 살기 위해 '너와 나의 생사는 다르다'며 썰매개와 자신을 잇는 밧줄을 끊어버린다. 몰살당한 썰매개들에 대한 죄책감은 생명의 구원자의 모습으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속죄하는 삶을 산다. 인간이 반려견과 같은 동물에게 사랑을 베풀지만, 중요한 순간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반려견들이 버려지고 생매장 당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개들도 인간을 공격하는 공격성을 보여준다. 검은 개의 무리는 119대원 한기준 팀장의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그의 아내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이는 단순히 '빨간눈의 괴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통제된 화양에서 대낮에도 강도, 강간, 살인이 난무하며 무정부상태로 변해가는 29만 명의 땅덩어리는 아수라라는 지옥을 떠올리게 한다. 그 속에 사이코패스 '박동해'라는 인물도. 애정 결핍이라고 하기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파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가족마저도 처절하게 버리는 인물. 부르르 손이 떨리는 인물이다.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

그 와중에 개마저도 어쩜 이리 매력적인지. 늑대개라 할 수 있는 '링고'는 투견장에서 살아남았고, 인간을 믿지 않는 개이다. '스타'라는 배우자를 찾자 늑대의 습성처럼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절제하고 길 찾는 법을 배운다. 인간에게 '스타'가 죽게 되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복수의 칼날을 간다. '개 따위'가 아니라 '링고'이기에 가능한 것 같다. 인스턴트식 사랑이 많은 현대사회에서 늑대의 본질을 다시 되새겨보게 했다. 이런 늑대를 막으려는 '스타의 대장 서재형'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도 그려본다.

절대 가볍지 않고, 마음은 무겁지만 끊임없이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 있는 문체가 작가를 되돌아 보게 했다. 정유정 작가의 책을 구입해 두고 이제야 읽게 되었는데, 시간적 여유 없으면 자신 있게 펴 볼 수 없는 책이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동안의 평이 과찬이 아님을 증명하듯이 퍼붓는 눈처럼 내리꽂히고 여러 인물들의 생각을 통해 반성과 자책과, 삶의 방향을 묻는 듯했다. 무거운 주제이지만 소설에 빨려들어가는 것은 쉽다. 게다가 간호사 출신인 작가 답게 병원의 분위기도 세세한 묘사와 권력관계가 잘 드러나서 사실감이나 신뢰감을 더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주제를 매끄럽고 무섭게 돌진하는 듯한 문체가 정유정 작가를 대변하는 듯했다. 우리나라에 이런 작가가 있었구나 하는 자각과 함께.

'책임'이라는 단어를 되새기며 내 스스로를 되돌아 본다. 사회부 기자 김윤주처럼 살아남기 위해 자극적이고 화려한 기사에만 목을 메고 정작 중요한 것을 어딘가에 버려두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본질, 인간본성, 늑대, 인수공통전염병, 빨간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