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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좋아하는 스타 작가들이 연이어 신작을 내놓는 바람에 요즘 우리 문학을 읽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다. 그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면 다음으로 읽을 책의 선택이 중요하다.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며 서점을 기웃거릴 때 장은진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를 만났다. 한번도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작가였지만,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믿음을 줬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다는 노래도 있는데, 왜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걸까. 그렇지 않아도 가을이라 마음이 참 쓸쓸하고 허전했는데,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고나면 그 쓸쓸함이 덜해질 것 같았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은 우리 삶의 길에 대한 근본적 이해뿐 아니라,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냐. (이청준의 「귀항지 없는 귀로」, p.280)

이청준의 단편 「귀항지 없는 귀로」의 한 구절로, 내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이 책 덕분에 쓸쓸함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덜해질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나처럼 쓸쓸한 사람이 한명은 더 있다는 위안 때문에.

오늘,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책 표지처럼 주인공은 개를 데리고 3년째 여행 중이다. 그는 매일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이 온 적은 한번도 없다. 답장이 오는게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클릭 한번만 하면 편지고 사진이고 보낼 수 있는 때에, 게다가 얼굴 보며 통화까지 할 수 있는 때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라니. 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이도 아니고 그저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난 여행자에게서 받은 편지에 누가 답장을 할까. 그나마 주소라도 제대로 알려주면 다행일 것이다. 그는 매일 아침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자신에게 답장이 도착했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친구의 대답은 3년째 똑같다. "포기해라 그만. 그 동안 한 번도 안 온 편지가 어느 날 갑자기 올 것 같냐?"(p.39) 그래도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답장 받으면 여행도 끝이라고 공언했으면 한 장이라도 받고 끝내야하지 않을까?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왜 이토록 편지에 집착하는걸까?

"종이편지보다 이메일로 소식을 전할 때 거짓말을 더 많이 한대요. 난 디지털로 편지 주고받는 거 싫어요. 아날로그가 좋아요. 언제 어디서든 옆에 두고 꺼내 읽을 수 있잖아요. 부팅을 해야만 읽을 수 있는 편지는 불편하고, 편지를 쓰고 읽기 위해 전기라는 비용을 따로 지불해야 한다는 게 어딘지 정도 없어 보이고 낭비 같아요. 인간의 기본 행위인 글쓰기조차 돈을 필요로 한다는 게 어째 좀…… 알게 모르게 글씨에서도 인격이나 품격이 드러나요. 상대방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되기도 한다고요. 디지털이 좋고 편한 건 알지만 전기가 없으면 그 위용을 결코 드러내지 못해요. 기약할 수가 없는 거죠.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특히 아날로그가 어울려요." (p.126)

그렇다. 아무리 세상이 디지털화 되고 편리해졌다해도 아날로그 편지가 가져다주는 그 따스한 촉감은 주지 못한다. 나 또한 이메일은 그저 스팸이나 업무용으로 치부할 뿐이지 서로의 생각과 감성을 나누는 매체로 여기지는 않는다. 편지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주인공과 아직 휴대전화가 없는 장은진 작가, 편지는 비단 그들에게만 따뜻하고 유용한 매체는 아닐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온 한 통의 편지를 받고 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여기서 편지란 당연히 DM이나 비보를 담은 편지를 제외한,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편지를 말한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주인공이 왜 편지와는 각별한 사이가 됐는지, 그리고 왜 아무도 주인공에게 편지하지 않는지가 밝혀진다. 이미 이야기를 읽으며 예상했던 이유지만, 그래서 시시하다기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살짝 힌트만 주자면, "삼순이와 삼식이"를 떠올려 보라.

예전에 한창 여행 다니던 때 그랬던 적이 있다. 주인공처럼 아는 사람이 아닌 나에게로 편지를 보냈던 적이 있었다. 낯선 지명의 소인이 찍혀있는 편지가 어찌나 신기하고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게 단 한 사람뿐이라 하더라도,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란다. 점점 쓸쓸해지는 내 생을 견딜 수 있게 해줄 그 한 사람은 누가 될까?

09-136.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2009/10/30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