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역사팩션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라면 『악의 추억』은 신선함으로 다가오리라!
   이정명 작가의 데뷔작인 『천년후에』를 읽은 나는 작가로서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뿌리 깊은 나무(2006)』와 『바람의 화원(2007)』을 읽고 잠시 동명이인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었다. 『천년후에(1999)』 이후 1년 간격으로 『해바라기(2001)』와 『마지막 소풍(2002)』을 발표했던 그가 무려 4년만에 작품을 써냈다. 가운데 두 작품을 읽지 못해서 그의 문장들이 어떻게 변해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데뷔작과는 사뭇 다른 작품이었다. 그가 2년만에 내놓은 『악의 추억』을 읽으며 또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그의 역사팩션 소설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역사와 사실을 밑바탕에 깔지 않은 그의 소설은 다소 낯설었다. 그러나 낯설었기 때문에 오히려 식상하지 않았고, 한번 잡으면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하는 흡인력은 여전했다.

방심하면 지는 것이다! (無스포일러)
   침니랜드와 뉴아일랜드를 연결하는 케이블카 안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죽은 사람은 금발의 여자. 아이러니하게도 눈은 울고 있는데 입은 웃고 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죽어가면서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일까. 살인사건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연이어 웃고 있는 시체가 발견되고, 정직 중인 형사가 수사팀에 합류하게 된다. 예전에는 연쇄살인마를 쫓았지만 지금은 정직 중인 형사 매코이와 시체만 봐도 비위가 상하는 심리분석관 스펜서, 출세지향적인 팀장 헐리, 정년을 앞두고 그저 조용히 형사 생활을 마감하고 싶은 카슨,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신참 패트릭. 이들로 구성된 수사팀이 연쇄살인범을 잡을 수 있을까?   이정명의 소설은 절대 방심하며 읽어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 반전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절대 속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잔뜩 긴장하고 이야기를 읽으면서 반전의 포인트를 찾았다. 그는 어떤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결국은 그 반대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것이라는게 보였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이야기가 마무리돼 갈 때, 나는 환호했다. 이쯤되면 나도 도사가 다 됐구나, 이 정도면 반전이 너무 약하지 않나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결국 난 이번에도 그에게 한방 얻어 맞았다. 아마도 그는 독자들이 나처럼 반전의 함정에 빠지길 원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바람의 화원』에서 바람처럼 사라진 신윤복처럼,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스토리 자체는 전혀 다르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처음부터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므로. 설사 무언가를 안다 해도 그것은 일부에 불과할 것이므로. 마침내 많은 것을 알았다 해도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니므로." (p.114)

   "당신 과거를 묻는 거예요. 과거는 한 사람의 전부니까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와 물, 단백질 같은 무기질로 만들어졌지만 한 사람을 완성하는 건 그의 과거예요. 시간과 기억이 그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구성하죠. 기쁨과 슬픔, 분노와 고통도 지금의 당신을 만든 것들이에요."  (p.237~238)

   사실 역사팩션소설은 읽으면서 얼마만큼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되는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뿌리 깊은 나무』가 그랬고, 『바람의 화원』이 그랬다. 그러나 『악의 추억』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한다. 무언가의 영향을 받은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재구성돼 가는지, 인간이 얼마나 자기합리화와 자의적인 해석에 빠져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도시는 두 얼굴을 지녔어요.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어둠 속에서 죄를 짓고 사람을 죽이지만 안개가 사라지면 해협의 물결처럼 아름답게 보이죠. 눈부신 미녀와 흉악한 야수. 어떤 쪽이 이 도시의 진짜 모습일까요?" (p.114)

   그들이 살고 있는 침니랜드와 뉴아일랜드가 선과 악의 두 가지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도 마찬가지고 나아가 모든 인간들이 그런 면들을 가지고 있다. 여느 때는 어느 한 면만을 보여주면서 어떤 것을 계기로 그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던 다른 면까지 표출하게 된다. 과연 나는 어떤 것을 계기로 그것을 표출하게 될까? 부디 그 계기를 만나지 않게 되길 바란다.
   읽을 때는 무서운 속도로 책에 빠지게 되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또다른 생각으로 빠지게 만드는 책. 너무 많은 생각들을 한 탓인지 제대로 정리되지는 않지만, 아무튼 가을이라 몸과 마음이 들썩여서 도통 책이 잡히지 않는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책 읽는 즐거움을 다시 발견하게 될지도.

09-133. 『악의 추억』 2009/10/19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