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원래 단편을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우리 문학은 거의 읽지 않아서 여러 작가들의 단편이 실려있는 수상작품집이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도전을 하게 된 것은 박민규 작가 때문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보여준 그의 유쾌한 글이 맘에 들어서 그걸 기대하며 얼마 전에 나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그동안 이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글이 달라졌을까? 예전에 그의 글이 재기발랄했다면 지금 그의 글은 너무나도 진지하다. 한마디로 작가로서 성숙해져가고 있고, 글 또한 야물게 익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즈음 그가 쓴 「근처」가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근처」는 2008년 『문학사상』 8월호에 실린 단편이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2008년 12월부터 2009년 5월까지 예스24 블로그에 연재했던 작품이다. 선후를 따지자면 「근처」가 먼저였고, 그의 변화가 궁금한 독자라면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다."(p.17)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호연)’는 너무나도 성실하게 사느라 마흔이 되도록 결혼조차 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살고 있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맥주 한 컵이면 족한 주량인데, 의사는 간암이라면서 죽는다고 한다. 그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어릴적 살던 고향으로 내려간다. 고향에 내려간 그가 한 일은 어릴적 친구들과 함께 묻어놓은 타임캡슐을 찾는 것이었다. 그 타임캡슐에는 ’나’와 동구, 호기, 순임이 아끼는 물건과 꿈이 담겨있었다. 친구들과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며 사는 ’나’에게 순임이 자주 찾아온다. 친구들은 예전의 순임이 아니라며 주의를 주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 서로를 부둥켜안은 날, 순임은 나에게 그동안 아껴뒀던 말을 한다. "나 돈 좀 빌려 줘."(p.47)
   ’나’는 내내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여느 사람들 같았으면 그동안 성실하게만 살아온 자신의 삶이 아까워서라도 분노하고 좌절했을텐데, 그는 오히려 그렇게 쌓아왔던 것을 아까워하지도 않고 서슴없이 내주려 한다.

나는 무엇인가? 이쪽은 삶, 이쪽은 죽음... 나는 비로소 흔들림을 멈춘 나침반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 (p.39)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으므로 삶에 대한 미련이 적어서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이 <나>의 것이 아닌 그저 <나>의 근처를 배회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짧은 단편이었지만 읽고나니 마음 한켠이 헛헛했다. 결국 내 삶도 ’나’와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박민규의 「근처」를 수상작으로 선정하는데 합의했다. 이 작품의 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점들, 즉, 죽음이나 미혼의 독신자라는 인물 설정이 ’근처’의 성찰을 잘 부각시키지만 그 대신 작위성과 감상성을 수반하게 된다는 점, 어린 시절에 함께 묻어둔 타임캡슐이라는 모티프가 진부한 것일 수 있다는 점, 그 타임캡슐이 두 개 이상이었다는 설정에 개연성 문제가 있다는 점 등에도 불구하고 주제, 문장, 조직 등 여러 측면에서 갖는 이 작품의 장점이 귀중하고, 뿐만 아니라 그 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점들조차도 단순히 약점인 것만은 아니고 문제적인 것이 될 수도 있으며(이 점을 밝히려면 꽤나 길고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겠다), 게다가 이 작품이 작가 박민규라는 맥락에서 볼 때 의미 있는 변화의 표지일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수상을 축하하며 이 작가의 발전적 변화를 기대해 본다. (p.8)

강영숙의 「그린란드」, 김경욱의「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김사과의「정오의 산책」, 김숨의「간과 쓸개」, 김애란의「너의 여름은 어떠니」, 김중혁의「c1+y=:[8]:」, 배수아의「올빼미의 없음」, 은희경의「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전성태의「이미테이션」 등 총 10편의 최종후보작 가운데 박민규의「근처」를 수상작으로 뽑은 심사위원들의 평이다.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수상작으로 뽑은 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들도 그의 변화를 눈여겨 보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 역시 진지하고, 특유의 문단 나누기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다. 나 또한 그의 발전적 변화를 기대해 본다.

   10명의 작가가 쓴 10편의 단편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맛있는 음식들만 모아놓은 뷔페를 먹는 것과도 같다. 뷔페를 먹고나면 그 중에서도 특히 맛있었던 음식만 다시 찾아먹게 되는데, 나는 이 수상작품집에서 김애란이라는 또 한명의 작가에게 빠져버렸다.
   책표지에 그려져있는 김애란 작가의 캐리커처를 보면 나이가 꽤 들어보인다. 그런데 작품과 함께 실린 그녀의 프로필을 보고 깜짝 놀랐다. 1980년생. 이제 겨우 서른이다. 나와 같은 나이대의 작가이기 때문일까? 짧은 단편을 통해 들여다 본 그녀의 감성코드가 딱 내 스타일이었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글이 좋아서 책을 덮자마자 그녀의 소설집들을 샀다.
   반대로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작가도 있다. 몇 번을 읽어도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지 모르겠다. 배수아, 그녀와의 만남은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09-138. 『2009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 근처』 2009/11/05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