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형제가 없는 저 같은 소녀들은 오빠에 대한 판타지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죠. 아님 말구요. 아무튼 전 그렇습니다. 예를들면, 나를 괴롭히는 남자 친구가 있으면 오빠가 짠~하고 나타나서 혼내줄 것 같은거 말이죠. 이 판타지는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 남자 형제가 있는 친구들에겐 이런 판타지가 없는 걸 보면, 아마도 같은 지붕 아래서 생활하는 오빠(!)가 생기게 되면 이 판타지도 사라질 것 같아요.

   아무튼 전 아직까지도 그런 판타지를 갖고 있는 소녀인데, 책을 읽다보면 정말 멋진 오빠 혹은 선배들이 튀어나와서 마음을 혹하게 만든다거나 방바닥에 이불 깔고 데굴데굴 구르고 싶을 정도로 배가 아플 때가 있죠. 요즘은 우리 문학들을 주로 읽고 있는데, 우리 문학이라 그런지 그런 오빠 혹은 선배들이 더 자주 튀어나오는 것 같아요. 
   최근 제 마음을 빼앗아 버린 오빠 혹은 선배를 소개합니다.

1. 요한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요한은 주인공의 알바 선배입니다. 백화점 신입 주차요원인 주인공에게 이런 저런 테크닉을 전수하죠. 뿐만아니라 성격 또한 쾌활해서 그에겐 어둠이란 없고, 어려움 또한 없어 보입니다. 나름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의 주인공과는 찰떡 궁합이라고 할 수 있죠. 주인공은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는 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데, 요한은 그 둘의 사랑의 메신저가 되기도 합니다. 아마 요한이 없었다면 그들은 데이트는 커녕 말 한번 제대로 건넬 수 없었을 거예요. 요한은 남자인 주인공에게도 조언을 많이 하지만, 주인공의 여자친구에게도 배려가 넘치는 말을 자주 건네요. 솔직히 제가 여자친구라면 전 주인공보다는 요한을 택할거에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한은 그리 밝은 사람이 아니랍니다. 아픔을 속으로 감추고 사는 사람이죠. 사실 이 소설은 결말이 두 개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는 요한이 자살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주인공이 죽고 요한과 여자친구가 함께 사는 것이죠. 주인공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전 여자친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2. 요한 (은희경의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이 단편은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려 있어요. 저처럼 박민규가 좋아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박민규의 「근처」가 실린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또다른 요한을 만나셨다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이 단편에는 안나와 루시아가 등장합니다. 물론 세례명이고, 둘은 단짝 친구입니다. 어느날 우연히 만난 요한을 안나는 좋아하게 돼요. 하지만 루시아는 시시하다고 했죠. 안나는 요한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만 궁금한 것 또한 많아요. 그러나 물어볼 수가 없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거든요. 사실 이 요한은 박민규의 요한보다는 매력적이지 않아요. 일단 안나가 아닌 루시아의 남자잖아요. 안나의 원래 세례명은 안나가 아니라 요안나인데, 루시아가 줄여서 안나라고 부르는 거랍니다. 혹시 아시나요? '요안나'는 '요한의 처'라는 의미래요. 그런데 정작 요한은 그 의미를 모르더군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루시아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안나는 요한과 함께 보내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요한 앞에서 안나가 결정적인 실수를 해버려요. 그리고 그 이후로 요한은 루시아에게도, 안나에게도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정말 요한도 안나를 좋아하고 있었던걸까요?

3. 준이 선배 (김애란의 「너의 여름은 어떠니」)
   준이 선배는 주인공 미영의 대학 선배입니다. 술 자리에서 살짝 빠져나와 혼자있는 미영이를 발견하고 살짝 말을 건네죠. 그런거 있잖아요. 아무도 내 존재를 모를거라 생각했는데, 누군가 알아줄 때 정말 고맙잖아요. 게다가 선배는 미영이 자신조차 예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예쁘다고 말해주고 관심가져주는 사람이랍니다. 뿐만아니라 이 선배랑은 우연히 조우하는 날이 많아요. 아무도 없을거라 생각하고 갔는데, 거기에 선배가 있는거죠. 미영이가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으면 '고개 좀 들고 다녀라, 이 녀석아.'하며 커다란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주며 친근함을 표시하기도 하죠. 그럴때마다 미영은 껌~뻑 선배에게 넘어가곤 하죠.
   하지만 이 선배 참 무신경합니다. 미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몰랐을까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미운 모습을 보여주는게 당연히 싫은데, 선배는 미영에게 일부러 미운 모습으로 분장해 방송까지 나가라고 합니다. 시무룩해하는 미영에게 또 그말을 내뱉죠. '고개 좀 들어라, 이 녀석아.' 어이쿠,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제 가슴마저 무너져 내리네요.

   이 오빠들은 소녀가 가지고 있던 판타지를 과감히 깨줍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게 현실인걸요. 하지만 제 정신 건강을 위해 지금처럼 앞으로도 쭉~ 판타지를 갖고 살렵니다.
   아참, 제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놀라서 알려주려구요. 어제도 그랬네요. 열심히 이야기하다가 데이트 하러 간다고 하니 놀라더라구요. 누구랑?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고. 데이트가 맞긴 맞죠.^^
   전 또다시 데이트를 하러 갑니다.

   아참! 오늘 기사를 보니 장동건과 고소영이 연애를 한다고 하더군요. 지난번 영애씨 결혼 때고 충격이었는데, 이번에도 충격입니다. 그 둘이 만나는게 충격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외로워한다는거예요. 그런데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저같은 사람은 도대체 뭘 믿고 이러고 사는지. 그래서 더 쓸쓸해지더라구요. 그들조차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라니. 전 버텨낼 수 있을까요? 아무튼 그래서 이 판타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2009/11/05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