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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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화를 보는 게 참 더디다. 그러니까 영상물 만화말고, 인쇄물 및 웹툰을 비롯한 프레임 안에 그려진 만화(이런 용어가 따로 있을터인데 무식해서 이렇게 밖에 설명을 못하겠다)를 보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따라서 나와 함께 시리즈 만화를 같이 보는 사람은 아마 짜증을 낼지도 모른다. 도대체 언제 다 볼거야? 응? 이라며 재촉을 할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어릴 적 우리집에 있던 만화는 엄마가 사준 학습관련 전집류와 남동생이 한때 심취했던 짱구 시리즈와 슬램덩크 정도였으니 소장 목록이 참 소박했다. 동생하고 같이 과자를 먹으며 만화책을 보면 진짜 엄청나게 느리다는 핀잔을 받아야했다. 나중에 나는 왜 이렇게 만화를 늦게 볼까에 대해 원인 분석을 해봤는데... 동생의 분석이 일리가 있다. 누나는 감탄사 하나하나까지 또박또박 눈으로 읽고 속으로 소리내 본다는 것. 빨리빨리 책장을 넘기며 감탄사 따위는 눈으로 훑어야 하는건지 알지 몰랐던 것이다. 만화를 느리게 읽는 이유를 알지만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못하겠고 사실 고쳐야할 필요성도 잘 모르겠다. 내가 불편한가, 나와 함께 만화 보는 사람이 불편하지 라는 무한이기주의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낙천성의 발로라나 뭐라나.

아,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졌다. 만화 보는데 걸리는 시간을 이야기한 건 바로 이 책, <대한민국 원주민>을 볼 때는 나같은 만화읽기법이 여러모로 합당하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프레임 한 컷 한 컷에 담긴 모든 글씨와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며 이 만화를 보기를! 제발 그러하기를 바란다. 이제부턴 진짜 이 책 이야기를 해야겠다.

일단 별 다섯개 만점에 다섯개를 주고 강력추천 엄지 손가락을 힘주어 들어주고 시작하련다.
만화에 별다른 취미가 없어도, 최규석이라는 만화가 정도는 알고 있다. 그가 만들어낸 만화들이 심심풀이용(만화 자체를 비하시킬 의도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만화를 이렇게 밖에 이용 못하는 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이다.)으로 활용되기엔 아까운 것들이어서 보고 나면 늘 가슴이 묵직했었다. 한겨레에 <대한민국 원주민>이 연재되었을 때 기사글 보다 이 만화를 먼저 펴보았을 정도로 좋아했었다. 단행본으로 엮어 나온 최규석 만화가의 책을 간밤 읽어가다가 눈물 콧물 펑펑 쏟다 잤다. 아, 다시 읽어도 눈물을 쏟아내게 하다니 이 만화는 정말 너무 좋다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 책의 제목이 왜 대한민국 원주민인가에 대해 최규석 작가는 자신의 부모 세대와 할아버지 세대를 떠올리면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원주민하면 부시맨 이미지가 강해서 대한민국과 원주민은 생경하게 생각해보면, 그럴듯 하다. 우리가 불과 100년 만에 겪은 역사는 변화가 변화로 치환되는 그야말로 격동의 역사 속에서 삶의 방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물론 근간에 흐르는 무언가는 아직도 우리의 삶의 근간을 흐르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내가 엄마 아빠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이냐고 묻게 된다. 세대간 유년의 기억이 이렇게 차이나는 경우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까 싶어진다.

이 만화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최규석 작가와 그의 가족이 겪은 100% 실화이다. 전해들은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모두 믿어도 정도라고 작가가 자신했을 정도이니 이야기의 생생한 생명력은 아마 실화라는 것에서 오는 것일 게다. 만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그야말로 '대한민국 원주민'이다. 70년대 세대인 최규석의 경우도 내 보기엔 '대한민국 원주민'이다. 가난에 허덕이고, 무지에 허덕이고, 가문 출세에 허덕이던 지난 시절의 이야기. 장남 하나 성공 시키겠다는 생각으로 딸들은 모두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으로 갔었어야 했던 이야기, 자식 공부를 위해 상경해서 파출부를 다녔던 엄마 이야기, 노름과 술로 가산을 탕진했어도 하늘이었던 아빠 이야기... 순박했던 시골 사람들 이야기, 일본 식민지 이야기, 6.25 이야기... 책 한권에 이 모든 것이 담겨져있다. 프레임 안에 그려진 표정들이 곡진하게 이 모든 것을 증언해준다.
엄마에 관한 이야기와 장녀에 관한 이야기는 '희생'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것으로 표현이 안된다. 만화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가족 한명 한명에 대한 최규석 작가의 스페셜 페이지와 사진에 담아둔 첫째 누나의 말이었다. '그때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다...'라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한참을 멍해있었다. 하고 싶은 공부 못하고 공장 다녔던 그 시절이 낭만이나 추억으로 기억되기엔 본인에겐 얼마나 아프고 쓰라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명백히 구분되는가하는 질문에서는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지금도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하고, 그들이 느끼고 있는 위화감은 어쩌면 이전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클지 모른다. 이 만화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감정을 강요받지 않고서도 콧날이 시큰해질 수 있는 것은 나의 부모가, 지금의 내 이웃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최규석 작가의 전작들을 한번이라도 접한 사람이라면, 혹시라도 그의 개인 홈페이지 모과넷에 접속해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지닌 문제의식이 매우 와닿으면서 멋지다는 것을. 이 만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주고자 했던 메시지가 지난 간 세월에 대한 단순한 감상과 연민이 아니라 '시대는 겹쳐서 존재한다' 라는 메시지라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혹자들이 세련되지 않았다고 그의 만화에 대해 말해도 난 최규석 작가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 사실 교과서 삽화류 같다는 촌스러운(내가 보기엔 포근하기만 하구만!) 최 />
오늘 이 책을 엄마에게 권했다. 엄마가 이 만화를 보고 운다면, 분명 그것은 어젯밤 내가 흘린 눈물과는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