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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중앙일보

모처럼 서울 나들이에 나선 강은교(62.사진) 시인을 만났다. 부산에 터를 잡고 동아대 강단에 선 지 20여 년인 그는 산문선집 ’어느 불면의 백작부인을 위하여’(이룸, 288쪽, 9700원) 출간과 관련해 출판사 인사들을 만나러 온 길이라 했다. "고마운 일이죠. 이렇게 지난 글을 챙겨주는 후배가 있으니….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 후배에게 (역할)모델이 되어줄 선배, 선배의 뒤를 따르려는 후배가 많이 있었으면 싶었어요."

시인의 말처럼 이번 산문선집에는 아름다운 사연이 숨어 있다. 문학청년 시절부터 시인의 작품을 가슴에 품었던 후배 시인 손택수씨가 책을 엮었다. ’그물 사이로’(지식산업사.1975년)에서 ’사랑법’(솔과학.2004년)까지 강 시인의 산문집 11권을 샅샅이 뒤져 22편의 글을 골라냈다. 손 시인은 단순한 글모음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새로움이 사라지지 않는, 그러면서 강 시인의 작품세계와 내면을 잘 보여주는 글을 골라냈다 자부했다. 정작 옛 글을 다시 보는 본인의 심정은 어떨까.

"40년이 되도록 시에 관한 내 생각이 참 변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맘에 드는 글은 없더라고요."

이것 순전히 겸양이다. 암울했던 70년대 그의 시집 ’허무집’ ’빈자일기’ ’풀잎’ 등은 발표할 때마다 큰 울림을 빚었으며 그의 산문은 시보다 더 정제되고 정결하다는 평을 들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골라낸 글은 4부로 묶였다. 1, 2부는 유년 시절 추억이나 일상에서 길어낸 단상들을, 3부는 죽음에 관한 성찰을, 4부에는 그가 생각하는 시론(詩論)을 담았다.

"시는, 삶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가 말하는 치유의 방법은 ’소통’이라 했다.

"서양의 의술에서 많이 쓰는 절단만으로는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죠. 아픔을 나눔으로써만이 치유가 가능하다고 봅니다."그는 누구와 소통을 꾀하는 것일까.

"학생들을 가르치며 반성도 많이 하고 많이 배우기도 해요."

강의가 젊은이들과의 소통 경로라면 홈페이지(http//river.namoweb.net) 운영을 세상을 향한 그의 손짓이다.

"원래는 시가 가진 치유의 힘을 알리기 위한 시낭송모임 ’시바다’를 홍보하려던 건데…. 시는 물론이고 청탁을 받아 쓴 글도 올려 놓지요. 방문객들 중엔 의외로 중고생도 많은데 댓글이나 자기 작품평 요청 등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좋아요."

’허무’ ’고독’ ’순례자’ 등의 시어로 많은 문청들을 설레게 했던 시인은, 세월도 비껴간 듯 여전히 맑고 고운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