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인 J시를 찾았다가 자신과 불륜관계였던 혜린을 만났던 현재는

1주일 후 혜린이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는 것과 동시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당합니다.

그녀의 카드를 사용한 부랑자가 범인으로 체포되면서 일단 혐의를 벗게 되지만

현재는 살해당하기 전후의 혜린의 행적이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자신을 취조했던 최형사로부터 혜린이 죽기 직전 J시에서 만난 여인에 대해 전해들은 현재는

그 여인을 시작으로 혜린의 동선을 하나씩 되밟아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할아버지 정윤조와 관련된 사람들이었으며,

현재는 왜 혜린이 연고도 없는 J시에서 그들을 만나려 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독립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온갖 풍상과 전쟁의 참화를 이겨낸 뒤 치과의사로 성공했고,

전후에는 멸치 파시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J시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았지만,

동시에 아내를 방치한 채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던 희대의 바람둥이, 정윤조...

현재는 전쟁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할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였던 여인들을 통해

지난 60여 년간 봉인되어왔던 비밀들이 하나씩 벗겨지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혜린의 죽음이 봉인됐던 비밀을 푸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 ● ●

 

2월 30일이라는, 존재할 수 없는 날에 태어난 한 여자의 죽음에서 출발한 이야기지만

작가가 펼쳐놓은 서사의 폭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60여 년이라는 시간만큼 깊고 방대합니다.

전쟁의 시대를 살아야했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좇던 추악하지만 절실했던 욕망을 뿌리삼아

작가는 권력, 이기심, 탐욕, 성욕, 살인, 시기, 질투, 치정(癡情) 등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본능들을 여러 캐릭터를 통해 민낯 그대로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정윤조-정태훈-정현재로 이어지는 3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정윤조는 칠순에 이르러서도 남의 여자를 넘보던 희대의 바람둥이였고,

평생 남편의 바람을 지켜봐야 했던 할머니는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아버지 정태훈은 처제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이력이 있고,

어머니는 시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남편을 증오하며 끔찍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들 정현재는 임신한 아내를 둔 채 함께 일하던 혜린과 몸을 섞었고,

아내는 뱃속의 아기를 지키면서 정씨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3대, 특히 할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한 불륜과 치정의 유전자는

60여 년에 걸친 비극의 이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저 한 쌍의 남녀가 금지된 영역에서 몸을 섞고, 쾌락을 맛보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의 인생을 끝장내거나 큰 상처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60여 년에 걸친 현대사의 비극’과 ‘불륜과 치정’이라니

물과 기름 같기도 하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아이러니한 조합이 아닐 수 없지만,

작가는 살아있는 캐릭터, 적절히 배치된 사건, 베일에 싸인 과거사를 정교하게 구성함으로써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무게감과 리얼리티를 이끌어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설정은 ‘기억’과 ‘과거’에 관한 것인데,

혜린을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된 현재는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증상을 갖고 있습니다.

덕분에 혜린이 살해된 시점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렸고,

어쩌면 정말 자신이 혜린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동시에 현재는 혜린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만난 사람들에게

길게는 60여 년부터 짧게는 20여 년 전의 일들을 기억해내라고 다그칩니다.

사라진 자신의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타인의 기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현재의 이중적인 모습을 강조함과 동시에

작가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캐릭터의 이름을 통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는 현재에 충실히 살라는 의미로 ‘현재’,

여동생에게는 항상 앞을 생각하라는 의미로 ‘미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어디선가 ‘과거’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기억’과 ‘과거’를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사건이나 캐릭터가 종종 등장하는데,

독자에 따라 작위적이라 여길 수도 있고,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한 괜찮은 설정이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는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내버려두어도 스스로 일어난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아주 잘 뽑힌 한 줄의 카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파 껍질처럼 벗길수록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현재’의 진실들과

고구마 줄기처럼 아무리 뽑아내도 끝없이 뽑혀 나오는 ‘과거’의 진실들,

그리고 그에 발맞춰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역겹거나 안타까운 죽음들이

적잖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오차 없이 직조된 덕에 하루 만에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김서진 작가의 첫 작품인 ‘선량한 시민’ 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두 번째 작품인 ‘2월 30일생’을 보고나니 첫 작품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이만한 서사를 꼼꼼하고 빈틈없이 요리한 필력으로 미뤄볼 때

그녀의 첫 작품 역시 큰 기대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작가의 후기 중 이 작품의 작의를 압축한 부분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칠까 합니다.

 

뻔뻔함과 노골적인 욕망을 지닌 지독한 악당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면서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인물을...

동시에 우리 시대의 분위기, 핵심을 드러낼 수 있는,

또 그를 통해 현대사 60년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욕망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