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20개월째 임신 중인 여인이 있다’라는 소문 때문에

유서 깊은 산부인과 가문 구온지 家에 관심을 가졌던 삼류기고가 세키구치 다츠미는

고교 선배이자 탐정 에노키즈를 찾아갔다가 구온지 家의 장녀 료코와 마주칩니다.

소문으로 떠돌던 ‘20개월째 임신 중인 여인’은 료코의 동생 교코였고,

료코는 밀실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교코의 남편 후지마키의 생사 확인을 의뢰합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세키구치는 료코를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빠져듭니다.

 

엉겁결에 에노키즈의 조수로 구온지 家에서 조사를 하게 된 세키구치는

료코와 교코의 부모 등 관련 인물들을 탐문하며 사건 현장을 둘러보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글들로 가득찬 일기장과 단편적인 단서 외에는 소득을 얻지 못합니다.

하지만 료코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기시감은 점점 짙어지고

혹시 자기 자신이 구온지 家의 비극에 연관돼있는 게 아닌가, 라는 느낌까지 받습니다.

 

천재 음양사 교고쿠도, 괴짜 탐정 에노키즈, 경찰 기바까지 개입하면서

교코의 20개월의 임신, 그 남편의 밀실 실종, 구온지 산부인과를 둘러싼 영아살해 의혹 등

일련의 사건들의 진상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오래 전부터 구온지 家를 짓눌러온 비극의 연장일 뿐이며,

뿌리는 하나인, 즉 하나의 사건에서 파생된 다수의 참상이라는 점도 밝혀집니다.

세키구치가 료코를 보며 느꼈던 공포감을 수반한 기시감의 실체도 함께...

 

● ● ●

 

신(神) 또는 괴담이나 전설을 소재로 한 일본 미스터리는

명백한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시선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여름만 되면 ‘전설의 고향’이 생각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많지는 않아도 비슷한 류의 작품들을 꽤 읽어봤지만,

‘우부메의 여름’은 거의 극단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엽기적인 사건이나 괴담을 소재로 삼류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주인공 세키구치부터

과거에 벌어진 일을 볼 수 있는 환시(幻視)의 능력을 가진 괴짜 탐정 에노키즈,

세상의 모든 지식을 꿰고 있는 고서점의 주인이자 뛰어난 음양사(?) 교고쿠도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끌고 가는 주인공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작품의 주요 공간인 낡고 오래된 산부인과 구온지 가문의 인물들 모두

하나같이 독특하다 못해 기괴한 분위기를 내뿜는 캐릭터들 투성이입니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초자연적인 현상에서부터

뇌와 신경, 양자역학, 심리학 그리고 각종 종교적 논쟁까지 아우르는

그야말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화려한 말의 성찬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논리적인 전개 따위는 깨끗이 무시한 채,

수상(?)하기 그지없는 궤변과 형이상학적 비유가 이야기의 흐름을 좌지우지 하기도 하고,

신비한 주술과 주문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조차 이 작품이 호불호의 논쟁을 크게 일으켰다고 하니

한국 독자들에게서 극단적인 평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할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고쿠도 시리즈는 ‘우부메의 여름’으로 처음 시작하게 됐지만,

교고쿠 나츠히코의 다른 몇몇 작품들을 읽은 덕분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곳곳에서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가는 정체 상태와 마주치게 됐습니다.

 

겨우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 것은 본격적인 사건 묘사가 등장한 후부터였는데,

물론 여전히 ‘이건 뭐지?’라는 의문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오래 전부터 캐릭터들을 옭아매왔던 비극적인 진실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중후반부 이후에는 교고쿠 나츠히코만의 매력이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후반 200여 페이지에 걸쳐 음양사 교고쿠도가 벌이는 다분히 주술적인 의식은

한 시도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긴장감 있게 진행되며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불쾌감이나 이물감을 버리지 못할 독자도 적잖이 있겠지만,

저 같은 경우 스스로에게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읽어!’라는 주문을 걸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어느 시점부터 일반적인 인식의 차원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나니

오히려 사건과 진실, 이야기의 흐름에 더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교고쿠도 시리즈들 역시 이런 ‘독자의 자세’를 필요로 한다면

무척이나 피곤하고 가시밭길 같은 책읽기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교고쿠 나츠히코의 엔딩이 주는 마약 같은 유혹은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연이어 시리즈를 읽는 것은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자제함이 좋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