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이방원-정도전의 3각 관계는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할 정도로 극적인 요소가 강한 구도입니다.

부자간의 권력투쟁과 제로섬 게임의 양극에 선 정치 라이벌이라는 설정은

일부러 지어낸 허구처럼 긴박감을 갖고 있고,

처참한 살육으로 막을 내리는 과정 역시 픽션 속의 한 장면 같기만 합니다.

 

‘순수의 시대’는 이 3각 관계에 가공의 인물들을 끼워 넣음으로써

극적인 긴장감을 한층 강화시킨 팩션 소설입니다.

정도전의 사위이자 삼군부사로 북방을 호령하던 김민재,

일개 해어화에서 김민재의 첩이 되지만 비련의 주인공이 되고 마는 가희,

그리고 김민재의 아들이자 경순공주의 남편이며, 가희와는 악연으로 맺어진 한량 김진 등

비극적인 멜로와 탐욕, 배신, 복수 등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들을 투입함으로써

자칫 너무나도 익숙한 조선 초기 권력투쟁의 재판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에

전혀 새롭고 흥미로운 포장을 입혀놓습니다.

 

개봉된 영화로는 보지 못했지만, 대중적인 코드들이 곳곳에 설정되어 있고,

화려한 액션과 적절한 선정성, 매력적인 캐스팅 덕분에

상업영화로서의 미덕을 고루 갖춘 작품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책으로 출간된 ‘순수의 시대’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분량과 깊이입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원작 프로세스와는 반대로 영화를 소설로 재포장하다 보니

디테일한 묘사와 깊이 있는 심리묘사가 부족했고,

결과적으로 간결하고 쉬운 책읽기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장은 고급스럽고 군더더기 없이 유려하게 흐르고 있지만,

좀더 묵직한 서사를 운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왕자의 난’으로 상징되는 조선 건국 초기의 권력투쟁의 단면과

척박한 운명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개인에게 관심 있는 독자라면

‘순수의 시대’가 품고 있는 팩션의 재미를 위해 한나절 정도 투자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