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유주얼 서스펙트’만큼이나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던

영화 ‘L.A 컨피덴셜’의 원작자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장하게 됐던 작품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을 뿐 아니라 블랙 달리아라는 제목 자체도 매력적인 작품이었지만,

두 권으로 나뉜 분량의 압박 때문에 책장에 꽂힌 지 거의 3년 만에 읽게 됐습니다.

 

● ● ●

 

전후의 혼란이 미국 사회 전반을 잠식하고 있던 1947년 1월,

L.A 할리우드 공터에서 참혹하게 두 동강 난 엘리자베스 쇼트의 알몸 시체가 발견됩니다.

전직 권투선수이자 거칠기 짝이 없는 두 형사 리 블랜처드와 드와이트 ‘버키’ 블라이처트가

언론에서 블랙 달리아라고 별명 붙인 이 사건에 투입됩니다.

 

하지만 목격자나 제대로 된 단서도 없이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검찰과 경찰의 고위직들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할뿐이며,

하이에나 같은 언론은 물론 타락과 부패로 얼룩진 동료 경찰들마저 훼방꾼 노릇을 하면서

리와 버키의 수사는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맙니다.

하지만 납치-실종된 여동생을 피살된 쇼트와 동일시 한 리는 광적으로 수사에 몰입했고,

버키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쇼트에게 도를 넘어선 집착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리 덕분에 홀로 쇼트의 마지막 행적을 쫓던 버키는

간과했던 단서들을 통해 미스터리였던 그녀의 행적을 찾아내고 결국 범인을 특정하게 되지만,

그의 직감은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진실은 더 깊은 곳에 있다고 속삭입니다.

 

● ● ●

 

1940년대 미국의 어두운 현실을 직시한 영화의 흐름을 ‘필름 누아르’라고 불렀고,

거기에서 파생된 추리소설을 ‘로망 누아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번역자에 따르면, ‘블랙 달리아’는 194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어둡고 운명주의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로망 누아르로 분류됩니다.

 

실제로 제임스 엘로이는 인종문제, 알코올 중독, 정신병, 범죄가 만연하던 1940년대를

왜곡되고 비틀어진 등장인물들을 통해 지독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은행을 털거나 각성제를 수시로 먹거나 섹스의 대가로 증거를 은닉하는 경찰,

부잣집 딸이지만 창녀처럼 살기를 원하는 여자, 승진과 명예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고위직,

개발의 붐을 타고 부실시공으로 떼돈을 번 남자, 시체 해부와 장기(臟器)에 집착하는 남자,

허영심에 빠져 한탕을 노리는 배우 지망생과 그녀를 성적 노예로 삼는 영화제작자 등

부정과 부패, 비리와 뒷거래로 얼룩진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대부분이며,

작품 전체를 통틀어 평범한 캐릭터라 부를 수 있는 인물은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어둡고, 성적으로 집착하고, 정서적으로 복잡하다.”라고 했다는데

‘L.A 컨피덴셜‘ 못잖게 블랙 달리아’는 이런 고백에 딱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투성이인 엘리자베스 쇼트의 삶과 마지막 며칠의 행적은 파헤칠수록 심연에 가깝고,

검은 드레스에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그녀의 외모는 어둠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버키는 동료 리의 여자인 케이, 피살된 쇼트를 닮은 매들린과 동시에 관계를 맺는가 하면

그녀들과의 성관계 도중 피살된 쇼트를 떠올려야 흥분이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동생의 트라우마를 쇼트에게 투사한 리의 정서적 불안은 파국을 불러오게 됩니다.

 

살아서는 환상에 빠진 거짓말쟁이 창녀의 기질을 독처럼 사방에 뿜어댔던 엘리자베스 쇼트는

죽어서는 자신의 죽음을 수사하는 두 남자에게 집착과 사랑의 대상이 됐고,

그 두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자의 삶을 망가뜨렸으며,

충격적인 토막 시신으로 발견된 탓에 탐욕스러운 언론과 정치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나쁜 여자’를 꿈꾸는 평범한 여자들에겐 두려움과 동경의 대상이었고,

‘나쁜 여자’를 장난감처럼 농락하고 싶은 남자들에겐 시커먼 정복욕의 대상이었습니다.

정작 살아있을 때의 모습은 탐문과 진술 속에서만 등장하지만,

블랙 달리아 ‘엘리자베스 쇼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희롱하면서

이 작품의 타이틀 롤에 걸맞는 판타지 같은 매력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블랙 달리아’는 별개의 두 작품으로 나뉘어도 될 정도로 복잡한 서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리와 버키,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여자 케이를 주인공으로 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평범하지 않은 우정과 사랑, 갈등과 파국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또 하나는 형사인 리와 버키가 블랙 달리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붕괴되는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접착제 삼아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 속에 두 가지 이야기를 절묘하게 믹스했습니다.

 

‘L.A 컨피덴셜’을 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은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엔딩은 충격적이지만, 깔끔하고 시원한 맛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범인에 대한 증오심이나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은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희미해지고,

번역자가 언급한 ‘선악과 도덕의 불명료성’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즉, 이 사건을 둘러싸고 자의든 타의든 상처를 냈거나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에게 돌을 던져야 하고, 누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불분명해지다 보니

사건이 해결되고 수렁에 빠졌던 주인공이 희망의 끈을 잡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결코 ‘해피하고 명료한’ 엔딩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마 적잖은 독자들이 이런 철학적인(?) 엔딩에 비호감을 표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자로 잰 듯한 작위적인 해피엔딩이나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오픈된 엔딩보다는 훨씬 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이라면 분량의 문제입니다.

블랙 달리아 사건 외에 조금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곁가지 에피소드가 끼어들었고,

그에 따라 자연히 인물들 역시 복잡하고 방대하게 설정되어 있는데,

500페이지 안쪽에서 마무리됐더라면 임팩트가 훨씬 더 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 국내에 출간된 것이 2006년이라 그랬겠지만,

굳이 분권할 필요가 없는 분량이 아니었나, 라는 아쉬움도 함께 들었습니다.

오탈자가 거의 없는 번역은 그 자체로는 만족스러웠지만,

너무 ‘점잖게’ 번역된 일부 비속어는 눈에 거슬렸습니다.

번역자도 스스로 그런 부분을 후기 말미에 언급했는데,

혹시 개정판이 나온다면 분권의 문제와 함께 좀더 리얼한(?) 번역을 기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