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과 ‘홍보카피’를 인용하는 것으로 서평을 시작하는 것이 좀 민망하긴 하지만

이 작품의 소개글로 이만한 표현들이 없을 것 같아 간략하게 믹스해서 정리해봤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질문인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를 성인이 되어 받게 된다면?

그것도 단순한 애정의 비교가 아니라 진실 대 거짓의 싸움이라는 난감하고 슬픈 입장이라면?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미쳤다고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끔찍한 범죄자라고 한다.

악당은 엄마일까, 아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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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에서의 은퇴생활을 위해 런던을 떠나 스웨덴으로 간 다니엘의 부모, 틸데와 크리스.

하지만 불과 몇 개월 만에 다니엘은 두 사람으로 인해 충격적인 상황을 맞이합니다.

런던으로 돌아온 엄마는 다니엘에게 스웨덴의 농장 일대에서 벌어진 범죄에 관한

확실한 물증과 단서를 갖고 있으며, 아버지도 용의자 중 한 명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엄마의 망상이 도를 넘었고, 그녀의 말은 모두 거짓이고 음모이며,

심할 경우 폭력을 쓰기도 한다고 주장합니다.

 

평생 싸움 한 번 한 적 없는 완벽한 커플이었던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엄마는 자신이 확보한 단서들을 내보이며 다니엘에게 스웨덴에서의 악몽을 설명합니다.

더불어 다니엘은 상상도 못했던 부부의 비밀과 엄마의 유년기의 끔찍한 사건도 듣게 됩니다.

스웨덴 외곽 엘크 강가의 농장에서 벌어진 사악한 범죄에 관한 엄마의 진술은 사실일까?

엄마를 극도의 망상증을 겪고 있는 정신병자로 여기는 아버지의 판단은 사실일까?

엄마의 유년기였던 1963년 여름과 올 여름에 벌어진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다니엘은 혼란스러운 진실 대 거짓의 싸움을 종결짓기 위해 모종의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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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롭 스미스는 ‘차일드44’ 3부작은 물론 ‘얼음 속의 소녀들’ 모두

가족 간의 사랑과 믿음과 비밀에 대한 이야기이며,

삶의 어두운 순간을 싸워서 극복하는 것이 공통된 주제라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차일드44’도 그랬듯이 이 작품 속의 ‘가족 간의 사랑과 믿음과 비밀’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고 잔혹한 비극성을 지니고 있고,

‘삶의 어두운 순간을 싸워서 극복하는’ 과정은 너무나 지난하고 고통스러울 따름입니다.

 

완벽하게 보이던 부부가 이국에서 보낸 4개월여 만에 ‘범죄의 목격자 對 용의자’로 갈라서고,

친척이라곤 전무한 외아들 다니엘은 그 가운데에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하기를 강요받습니다.

엄마의 진술은 정황은 그럴 듯 해보이지만, 그 해석은 확신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모호합니다.

엄마를 찾기 위해 낯선 남자와 함께 나타난 아버지 역시 무죄라는 확신을 전해주지 못합니다.

‘가족을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다니엘은 갈수록 더 큰 강도의 비밀과 고통을 만날 뿐입니다.

 

사실, 엄마의 진술을 토대로 재구성된 중반부까지의 스웨덴에서의 사건일지는

독자에 따라 조금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을 만큼 장황한 느낌을 줍니다.

첫 페이지부터 한시도 팽팽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던 ‘차일드44’와 비교하면

페이지는 생각보다 느리게 넘어가고, 문장은 평범하거나 만연체의 톤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쉽지만 이 점 때문에 별 1개를 줄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100여 페이지에서 드러나는 톰 롭 스미스의 진가는 말 그대로 압권입니다.

아, 이래서 톰 롭 스미스구나, 라는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연이은 반전과 비밀의 폭로는 흥분과 속도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다니엘에 의해 밝혀지는 끔찍한 과거사와 진실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초중반부에서 한때 물음표를 떠올릴 정도로 느껴졌던 동어반복과 약간의 지루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왜 그렇게 탄탄한 기초공사가 필요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야기의 초반 설정이 톰 롭 스미스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활하고 차가운 스웨덴의 숲과 호수, 농장지대를 이야기의 주 무대로 설정한 것은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내게 한 최고의 레시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소나무와 전나무의 숲, 웬만큼 작은 나라보다 더 크고 맑은 심연의 호수,

거기에서 태어난 신비하면서도 공포감으로 가득 찬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트롤 신화,

그리고 고즈넉해 보이기도 하지만 때론 음습한 기운을 내뿜는 오래된 농장들...

이런 배경 속에서 펼쳐지는 진실 대 거짓의 대결, 비밀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는

독자의 긴장감과 호기심을 배가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원제가 왜 ‘The Farm’인지는 책을 다 읽고 나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트롤 신화와 관련된 에피소드였는데,

작품 후반부에 3페이지 정도에 걸쳐 소개된 ‘트롤 공주’이야기는

잔혹동화라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잔인하면서도 섬뜩한 해피엔딩을 전해주는 것과 동시에

‘얼음 속의 소녀들’의 가장 핵심적인 서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독자에게 상반된 두 갈래의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톰 롭 스미스의 신작을 기다리면서 ‘차일드44’ 3부작이 당연히 먼저 나올 것이라 여겼기에

‘얼음 속의 소녀들’의 출간은 조금은 의외였지만,

그의 진면목을 다시 발견한 것 같아 반가웠고,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다리던 ‘차일드44’ 3부작의 나머지 두 편이 2015년에 연달아 출간된다고 하니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은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