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는 2년, 길게는 20년 간 실종됐던 사람들이 돌연 나타나 연이어 살인을 저지릅니다.

범인(들)은 마치 재판이나 처형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희생자들을 살해했고,

언제나 다음에 벌어질 살인사건의 단서를 현장에 남겨놓습니다.

 

‘속삭이는 자’ 사건 이후 실종전담반 림보에 머물며 사건현장과 담을 쌓고 살아온 밀라는

처음엔 상부의 수사참여 지시를 거부하지만 ‘범인=실종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7년 만에 피로 범벅이 된 사건현장을 찾게 됩니다.

 

인류학에 빠져 현장형사 대신 취조전문가가 된 사이먼 베리쉬와 콤비플레이를 펼치며

밀라는 실종자들이 나타나 벌이는 기이한 살인사건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갑니다.

그들은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전화를 받은 적이 있고, 특정한 약을 복용했으며,

납치나 유괴가 아닌 명백히 자발적인 형태로 종적을 감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밀라는 잊고 싶은 7년 전의 악몽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또, ‘속삭이는 자’가 남긴 공포가 또다시 그녀의 삶 속에 침투하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결국 밀라와 베리쉬가 들춰낸 사건의 진상은 그녀의 불길한 예감을 한참 뛰어넘어

치명적이고 잔인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 ● ●

 

오랜 시간 실종됐던 사람들이 나타나 살인을 저지른다는 설정은

실종된 소녀들의 신체 일부가 발견된다는 ‘속삭이는 자’의 설정만큼이나 독특했고,

스스로 종적을 감춘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왜 돌연 나타나서 살인을 벌이는지,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등

다양한 호기심을 자아내면서 몰입도를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사이먼 베리쉬라는 독특한 콤비플레이어가 다방면에서 적잖은 역할분담을 맡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존재감은 원톱 주인공 밀라 바스케스의 캐릭터 - 그녀의 상처와 트라우마,

그녀의 세계관과 가치관, 그녀의 연약한 가족과 암울한 미래 등 – 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녀의 캐릭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7년 전 ‘속삭이는 자’ 사건의 파생물들입니다.

그것은 후유증이나 트라우마라는 단순한 표현으로는 감당 못할 만큼 크고 거대했고,

밀라의 몸과 마음에 너무 깊이 새겨진 탓에, 이젠 화석처럼 굳어져 그녀의 일부가 됐습니다.

 

그 가운데 밀라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어둠’입니다.

어둠과 맞닥뜨렸을 때 그녀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면서도 기어이 그 안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그것은 자만이나 만용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생사를 헤매던 전쟁의 생존자가 또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당초 수사에 참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3차례나 거부한 것은

피로 범벅된 현장은 결국 자신에게 치명적인 인력(引力)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날 이후 그녀는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공감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넌 그 사람 거야. 그에게 속해있어.”라는 악마의 속삭임을 밤낮으로 듣게 됐습니다.

결국 고통스러운 기억을 통증으로 잊기 위해 스스로의 몸에 칼을 대기 시작했으며,

그런 자신의 삶이 전염이라도 될까 두려워 6살 된 딸 앨리스를 곁에서 떠나보냈습니다.

 

밀라 바스케스의 캐릭터에 대한 독자들의 호불호는 다양하게 갈릴 것입니다.

극적인 상황을 만들기 위해 작위적인 냄새가 날 정도로 설정했다는 의견도 있을 것이고,

그런 끔찍한 사건을 겪었다면 충분히 존재할 법한 캐릭터라는 의견도 있을 것입니다.

밀라의 대척점에 서있으며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존재로 설정된

‘속삭이는 자’와 ‘이름 없는 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픽션이라도 그게 가능하냐?’와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견으로 갈릴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밀라에 대해서도, ‘속삭이는 자’, ‘이름 없는 자’에 대해서도 반반 정도인데,

그래도 큰 거부감 없이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 도나토 카리시가 짜놓은 개연성 있는 사건들과 사실감 있는 조연들 덕분이었습니다.

 

특히 밀라의 조력자로 등장한 ‘인류학에 빠진 왕따 취조전문가’ 사이먼 베리쉬는

위기에 빠진 밀라를 대신하여 ‘이름 없는 자’의 실체를 밝혀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고,

자신을 못살게 굴던 상부와 동료들로부터 존재감을 인정받게 됩니다.

또한 사건의 큰 그림을 파악한 베리쉬가 밀라에게 설명한 ‘악의 논리’, 즉,

“선과 악은 공존하고 뒤섞인다. 선행을 위해 저지른 악행은 선도 악으로 만들 수 있다.”는

언뜻 말의 유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이면서

동시에 순수 악의 완성체인 ‘속삭이는 자’와 ‘이름 없는 자’의 행태를

간결하고 적확하게 표현한 문장입니다.

베리쉬의 ‘입과 발’이 보여준 뛰어난 활약으로 보건데,

앞으로 이어질 ‘속삭이는 자 : 세 번째 이야기’에서도 밀라의 파트너로서

꽤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읽기 전에는 이 작품의 부제를 왜 ‘밀라 바스케스 두 번째 이야기’가 아니라

‘속삭이는 자 : 두 번째 이야기’라고 붙였는지 궁금했었는데,

그 의문을 명쾌하게 풀어준 마지막 페이지의 단 몇 줄의 문장은

궁금함이 해소됐다는 시원함보다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드는 서늘함만 잔뜩 남겨줬습니다.

그래서인지 다 읽은 후에 오히려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실제 그런 문구는 없었지만, 제 눈에는 ‘To be continued’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전작에 이어 또다시 전대미문의 살인사건들을 해결하는 공을 세웠지만,

몸과 마음이 온통 트라우마 덩어리인 밀라 바스케스의 불행은 이번에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작가는 밀라와 그녀의 딸 앨리스에게 더 큰 시련이 닥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이 빠르고 변화무쌍한데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워낙 특징적으로 설정돼서

자칫 잘못 언급했다간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높아 구체적인 소개는 어렵지만,

그만큼 페이지는 빠르게 넘어가고, 묵직함과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인 만큼

가능하면 인터넷 서점의 책소개나 서평은 작품을 읽은 후에 찾아볼 것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