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은 ●●● 표시 사이의 글은 읽지 마세요)

 

동유럽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90년대만 하더라도 냉전과 민주화라는 이념적 이미지가 대세였지만,

요즘의 동유럽은 중세의 유산이 고스란히 간직된 클래식한 풍경을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프라하는 그런 동유럽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프라하가 북미나 서유럽의 대도시처럼 온통 세련되고 현대적인 풍광으로 변신했다면

많은 사람들의 ‘가보고 싶은 유럽’ 목록에 오를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일곱 성당 이야기’는 기능주의와 모더니즘, 현대화의 물결에 휩싸인 프라하를 붕괴시키고

영광된 14세기 고딕 양식의 프라하로 복원시키려는 비밀결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 ● ●

 

프라하의 중세 역사와 문화에 빠져있는 소심한 크베토슬라프 슈바흐는

경찰에서 해고된 지 얼마 안 돼 복직의 기회를 잡게 됩니다.

자신의 재력을 동원해 프라하의 건축물을 14세기 고딕 양식으로 복원하겠다고 나선

마티아슈 그뮌드가 경찰서장에게 슈바흐의 ‘안내 겸 경호’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중세 프라하로의 복원을 꿈꾸는 그뮌드가 슈바흐를 찾은 것은

그가 갖고 있는 특이한 능력 – 옛 건물이나 바위에 손을 대면 과거의 사건들을

볼 수 있는 능력 –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그뮌드의 카리스마와 중세 찬양론에 빠진 슈바흐는

그의 은밀하고 엄청난 계획에 일조하게 되고, 그뮌드의 고용인(?) 프룬슬릭,

특수반 여경찰 로제타와 함께 프라하 신시가지의 성당들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합니다.

 

한편, 그 무렵 프라하에는 기이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는데,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살인예고 메시지를 받은 후에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뮌드의 조력자 역할 뿐 아니라 살인사건 수사까지 맡은 슈바흐는

희생자들이 모두 건축 관련 종사자들이라는 점과 그뮌드 일행이 일련의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채지만, 서장은 그의 추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연쇄살인은 멈추지 않고, 그뮌드의 정체를 파악한 슈바흐는 더 이상의 협조를 거부하지만,

그로 인해 목숨이 걸린 큰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 ● ●

 

보기 드문 체코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 외에도

과거를 볼 수 있는 기이한 능력자, 중세로의 복원을 꿈꾸는 수수께끼 같은 세력 등

소재나 캐릭터 모두 독특함을 넘어 판타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역사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체코의 역사와 건축, 종교 이야기가 그려져 있고,

거기에 스릴러라는 형식까지 입힘으로써 방대한 서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역사-판타지-스릴러’라고 하면 될까요?

 

에필로그 마지막에 등장하는 ‘새로운 낙원의 시대, 아름답고 축복받은 14세기’라는 묘사는

작가가 주인공 슈바흐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함축해놓은 묘사입니다.

유럽으로의 여행을 계획할 때 누구나 한번쯤 동유럽의 고전미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그런 면에서 그뮌드가 꿈꾸는 중세 프라하 – 특히 카렐 4세가 14세기에 세운

고딕 양식의 신시가지 - 로의 복원 열망은 충분히 개연성 있고 공감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아마 이 작품이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작가의 작품이면서 런던, 파리, 베를린을

중세로 복원시키는 이야기였다면 개연성은 물론 쉽게 공감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연쇄살인의 진상은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쉽게 짐작이 되지만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살인수법과 동기 때문에 진범 찾기 이상의 긴장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건축 관련 종사자들의 연이은 죽음 외에도 연쇄살인과 무관해보이던 10대 소년들의 죽음,

후반에 밝혀지는 신비한 여경찰 로제타의 비극적인 과거 등을 통해 드러난 살인수법과 동기는

잔혹함을 넘어 마치 중세와 현대의 정면충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출판사의 소개 글에 보면 ‘비틀려 버린 과거와 더 좋고 아름다울 수도 있었을

현재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카피가 있는데,

말하자면 그 ’안타까움‘의 극단적인 발현이 연쇄살인이었던 것입니다.

 

번역자가 ‘옮긴이의 말’을 통해 “한국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나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암시가 곳곳에 깔려있다”라고 언급했듯이

과할 정도로 친절하고 상세하게 묘사된 14세기 이래 체코의 역사에 관한 언급은

‘한 권으로 읽는’ 시리즈처럼 쉽고 편안한 체코 중세사의 미덕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물론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을 상쇄시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에게는

‘일곱 성당 이야기’가 반갑고 흥미진진하게 읽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좀 당혹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예상치 못한 전개나 설명 때문에 순간순간 ‘뭐지?’라고 자문하곤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가 역시 본문에서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독자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을 것이다. (중략)

여러분은 내가 어떤 부분을 일부러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의심할 것이다. (중략)

진실을 찾는다면 이 단어의 미로 사이에서 내 뒤에 바짝 붙어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군, 이라고 조금 위로(?)받긴 했지만,

어쨌든 쉽고 빠르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중세와 현대를 오가며 판타지와 스릴러를 함께 버무린 독특한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얻을지 저 역시 개인적으로 많이 궁금해집니다.

무척 다양한 서평들이 올라올 것 같은데, 제 느낌과 얼마나 같은지, 또 얼마나 다른지

꼭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