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인간’의 뒤를 잇는 한스 올라브 랄룸의 ‘콜비외른-파트리시아 시리즈’ 2편입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경찰서의 콜비외른 크리스티안 경감과

천재적인 장애소녀 파트리시아의 콤비 플레이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으로,

전편과 마찬가지로 2차 대전이 남긴 씻을 수 없는 상흔과

그로부터 비롯된 굴절된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연쇄살인 심리 스릴러입니다.

전작의 제목인 ‘파리인간’이 과거의 끔찍한 경험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지칭했다면,

‘위성인간’은 어떤 이유로 한 사람의 주변을 평생 맴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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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5월 11일, 자신의 저택에서 열린 정례 식사모임 중 급사한 막달론 셸데룹은

2차 대전 당시 저항군으로 활약했고, 종전 후 기업을 일으켜 억만 장자의 반열에 올랐으며,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세 명의 자식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줘왔습니다.

그는 평생을 거만한 행성처럼 살아오면서 수많은 위성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막달론 셸데룹의 떡고물을 바라고 스스로 위성이 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의 폭압적인 권위와 독재 때문에 무력하고 속박된 삶을 강요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막달론 셸데룹이 급사한 현장에는 10명의 다양한 위성인간들이 함께 있었는데,

유산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두 명의 부인과 세 명의 자식,

저항군 시절의 인연으로 정례 식사모임에 참석했던 벤델뵈 부부와 한스 헤를로프센,

그리고 여동생 막달레나 셸데룹과 젊은 여비서 쉬노베 옌센 등이 그들이고,

이들은 모두 유력한 용의자이자 증인 자격으로 콜비외른 경감의 심문을 받게 됩니다.

 

콜비외른 경감은 ‘파리인간’을 통해 인연을 맺은 천재소녀 파트리시아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두 번째 희생자가 등장하고 범인의 추가살인 예고장이 날아오면서 패닉에 빠집니다.

산발적인 여러 단서들과 반복된 심문에도 불구하고, 유력한 용의자로 점찍을 만한 인물도,

딱히 용의 선상에서 제외시킬만한 인물도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결국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지고, 콜비외른 경감은 경질 위기에까지 몰리는데,

그 와중에 세 번째 살인이, 그것도 콜비외른 경감의 눈앞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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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그려진 막달론 셸데룹의 초상은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한 손에 권총을 든 채 고도비만인 아랫배를 불쑥 내민 그는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세상을 하찮게 여기듯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왜 하필 이 인물의 기분 나쁜 초상화를 표지로 삼았을까, 궁금했는데,

작품의 엔딩에 이르러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게 됐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다시 한 번 표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만큼 적절한 표지도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막달론 셸데룹은 적어도 자신이 관여하는 세상에서는 ‘왕’이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는 돈과 권력, 배려심 없는 횡포를 무기삼아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줬으며,

언제나 자신을 드라마틱한 존재로 빛나게 하기 위해 주변사람들을 다치게 했고,

종국엔 그런 타인들의 상처들을 발판삼아 부와 명예의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막달론 셸데룹이 죽던 날, 함께 식사 자리에 있던 10명의 위성인간 중

적어도 1명을 제외하곤 대부분 오래 전부터 그에게 살의를 느껴왔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는커녕 그로부터 도망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돌아야 하는 궤도에서 이탈하고 싶으면서도

이탈한 이후에 맞닥뜨려야 할 불안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단적이고 모순에 가까운 인물들의 심리를 작가는 탁월하게 묘사해냅니다.

자신만의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온 막달론 셸데룹에 대한 묘사는 말할 것도 없고,

무한한 이기심, 빗나간 애정, 들끓는 물욕, 제어되지 않는 복수심 등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살인 동기를 지닌 다수의 용의자를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단순한 사건 해결 스토리를 넘어 긴장감 넘치는 심리 스릴러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몇 차례의 반전을 거쳐 도달한 엔딩 장면은 파트리시아가 예상한대로

‘인간이 어디까지 악독해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들은 콜비외른 경감과 파트리시아가 진범을 밝혀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악의와 욕망이 자아낸 추악함의 바닥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치밀한 심리 스릴러로서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닌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위성인간’은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기고 있는데,

우선, 작품의 구성면에서만 보면 ‘파리인간’에 비해 입체감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콜비외른 경감의 적극적인 행동이나 추리보다는

10명의 용의자를 상대로 한 반복되는 심문 내용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데,

막달론 셸데룹의 저항군 시절의 미스터리한 에피소드라든가

양다리(?) 로맨스를 감행하는 콜비외른 경감의 끈적끈적한 해프닝은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동원된 흥미로운 설정들이었습니다.

 

아울러, ‘파리인간’에 앞서 ‘위성인간’을 먼저 읽게 된 독자들에게는

약간의 아쉬움이나 의아함이 남을 소지가 많을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작가 스스로 본문 안에서 ‘파리인간’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콜비외른의 캐릭터라든가 천재소녀 파트리시아와의 관계 등은

‘파리인간’의 사전 지식 없이는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파리인간’에서 아쉽게 느꼈던 콜비외른과 파트리시아의 관계는 ‘위성인간’에서도 여전했는데,

경감으로서의 콜비외른의 독자적인 탐문이나 추리는 전작에 비해 후퇴한 느낌이었고,

오히려 파트리시아에 대한 의존도는 좀더 높아진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면박에 가까울 정도로 콜비외른 경감에게 독설을 날리는 파트리시아를 보면서

경감 콜비외른이 왜소하고 무능한 캐릭터처럼 그려진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간결하고 쉬운 문장들 덕분에 페이지는 잘 넘어가지만,

긴장감과 속도감은 중후반부에 이르러 극적으로 상승됩니다.

초중반의 반복되는 심문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10명의 용의자와 과거-현재에 걸쳐있는 복잡한 살의를 감안하면

이 정도의 사전 포석은 독자 입장에선 감내할만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콜비외른과 파트리시아의 콤비 플레이가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파리인간’의 서평 마지막에서도 언급했듯이,

콜비외른 경감이 조금은 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수사를 펼치는,

멋진 주인공 캐릭터로 컴백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