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위기와 주인공들의 로맨스와 무자비한 킬러와 기억상실증이 잘 조합된 결과’.

역자 후기에 실린 문구인데, 이 작품을 한 줄로 깔끔하게 잘 요약한 표현입니다.

골치 아픈 트릭 대신 쉴 새 없는 긴장과 흥분을 선호하는 독자들이 좋아할만한,

즉, 전형적인 헐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캐릭터와 설정들로 가득 찬 스피디한 스릴러이며,

단숨에 500여 페이지를 완주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 ● ●

 

16년 전, 불의의 사고로 연인을 잃고 단기간의 기억마저 상실했던 케이트.

이후 미국으로 떠나 바이러스 학자로서, 잭의 엄마로서 살아가던 그녀는

남편과의 불화로 인해 16년 만에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어린 아들 잭과 함께 영국에서의 생활을 물색하던 케이트는

어느 날 거리에서 죽은 연인의 쌍둥이 형인 폴을 만나게 됩니다.

그를 통해 의문의 편지 한 통을 받아든 케이트는

16년 전의 불의의 사고 뒤에 뭔가 감춰진 진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잃어버린 당시의 몇 달 간의 기억을 되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폴 역시 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였기에 케이트를 도와 위험한 여정에 뛰어듭니다.

 

한편, 모종의 치명적 바이러스 개발에 주력하고 있던 건트 박사는

‘불편하고 귀찮은 업무’를 수행해온 존 샘슨에게 케이트의 귀국 사실을 알리며

그녀는 물론 동행인 폴까지 제거할 것을 지시합니다.

16년 전 처음 그녀를 만났던 순간부터 사랑과 증오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던 존은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케이트와 잭, 폴을 죽이기로 마음먹습니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폴에게 연정과 욕망을 느끼게 된 케이트는

그런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본능에 충실하기로 결심합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위험하고 지루한 수사에 어린 잭을 끌고 다닐 필요가 없다’였지만,

실은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욕망 때문에 케이트는 잭을 동생에게 맡기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악의 선택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 ● ●

 

앞서 언급한대로 이 작품에는 헐리우드 엔터테인먼트의 모든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가족의 안전 (아들 잭을 지키려는 케이트의 모성애),

인류를 위협하는 최첨단 무기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킬러 (살인을 통해 희열을 느끼는 존 샘슨),

끊임없는 재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아슬아슬한 로맨스 (케이트와 폴) 등

예측불허의 롤러코스터 같은 설정들로 꽉 차있습니다.

 

설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끌어가는 두 작가의 필력 역시

기성 작가 못잖은 힘을 갖고 있어서 신간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해줍니다.

16년 전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위기를 교차하며 잘 직조해낸 점도 뛰어났고,

현란한 표현 없이도 긴장감과 속도감을 놓치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덕분에 페이지 터너로서 빠짐없는 미덕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캐치 유어 데스’는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을 안고 있는데,

무엇보다 가장 큰 점은 주인공 케이트와 폴이 ‘평범한 민간인’이다 보니

결국 사건의 물리적 해결을 제3의 인물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16년 전의 진실을 찾아가는 모든 수고는 주인공들의 몫이었고,

목숨을 건 물리적 충돌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며 위기를 극복해내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들만의 힘으로 마무리할 수 없었던 부분은 여러 모로 아쉬웠습니다.

 

두 번째는 케이트를 위협하는 악당들의 캐릭터에 대한 것인데,

우선은, 건트 박사의 동기나 궁극적 목표가 조금은 현실감이 떨어져 보인 점입니다.

바이러스의 개발 이유에 대해 건트 박사가 나름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는 대목이 있지만,

좀 엉뚱해 보이기도, 추상적으로 보이기도, 의지에 비해 논거가 부족해 보이기도 해서,

‘악당의 자세’ 치고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좀더 설득력 있는 동기나 목표가 제시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또 한가지는 ‘케이트를 사랑하고, 증오하고, 원했고, 그래서 죽이고 싶어했던’ 존 샘슨이

엔딩에 이르러 급격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점입니다.

첫 살인을 저지른 18살 이래로 그의 악행은 어지간한 소시오패스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잔혹하고 소름끼치는 수준이었고, 거의 손아귀에 들어온 케이트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상상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살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지만,

정작 케이트를 마주친 뒤로 존 샘슨은 전혀 다른 캐릭터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16년 간 그가 케이트에게 품어온 복잡다단한 심리들이 수차례 언급되긴 했지만,

2% 정도 부족했던 설명 탓에 엔딩 부분의 존의 태도에 이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댄 브라운과 스티그 라르손, 마이클 크라이튼의 합작품’이라는 출판사의 소개 글이

약간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근거 없는 홍보용 멘트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묵직한 주제의식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가벼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의 미덕을 여럿 지닌 만큼 다양한 독자층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두 작가의 합작이 비교적 최근인 2011년에 시작됐으니 후속작 소식도 곧 들려올 것 같고,

무엇보다 첫 합작품인 ‘킬링 큐피드’의 출간도 기대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