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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쓸슬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 본문 346

가상의 수도권 도시 화양, 이곳에 인수공통전염병 이른바 '빨간눈 괴질' 급속도로 퍼져가는

이 괴질이라는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참으로 사람답습니다그려. 여기서 사람답다는 것은 칭찬도

아니고 욕도 아닌. 그저 부끄러우면서 동시에 어찌할 수 없는 비참하면서 또 미워할 수 없는 그런

모든 것들이 담긴 말입니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동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처분하고, 사람이기에

누군가를 살려 보려고 애쓰고 그러다 무너지고, 또 사람이기에 희망을 걸고 다시 절망을 넘어서려

애쓰고, 동시에 자기만 살아남겠다고 다른 이들을 무참히 짓밟습니다.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제가 가진 가장 밑바닥의 본성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살아야 한다는 것, 살고 싶다는 것,

살려 달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건 인간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본성이 바로 그러하니까요.

우리가 그저 우리의 목숨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시선 말고는 보고 들으려 하지 않을 뿐.

하나의 이야기는 다섯 사람의 시선, 한 마리의 개의 시선 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다

제 자리가 있고 제가 태어나 이유와 까닭이 있을 터인데.. 인간은 왜 이 모양인지 참으로 서글플

지경입니다. 작가는 재난 앞에서 무너지는 사람들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재난과 괴질 앞에서 깊은 바닥으로 내려앉는 절망을 우리 앞에

펼쳐냅니다. 그리고 겨우 실낱같은 희망 하나는 던져 놓습니다. 그 모든 삶의 폭력과 슬픔을

넘어서기 위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앞에서 우리가 왜 겸손해야 하는지, 우리가 왜 서로에게

기대가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를 책을 덮는 마음에 묵직하게 던집니다.

권선징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한다는 말이죠.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선을 권하기는 하지만 딱히 악이 벌당하지는 않는 세상입니다. 때로는

어디가 선이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조차 헷갈리는 세상입니다. 바로 이 책처럼 말입니다.

책에는 선도 악도 잘 구분되지 않는 생존과 소멸의 가차없는 칼날이 누구에게나 떨어지는 흡사

아비규환과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과격하기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삶이 세상이 권선징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니까요.

정유정 작가의 신작이 나온다고 했을 때, 드디어 나오는구나 하는 기대감과 더불어

이번 이야기가 과연 전작을 뛰어넘게 재미있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많이 되었습니다.

앞의 두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세 번째에서 홈런을 날려주었는데 이번에 어떨런지. 기대반 우려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곤 정신없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세계로 내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단문은 숨가쁘게 이어지면서 시선에서 시선으로 사건에서 사건으로 내달리게 합니다.

폭력적이면서도 자극적인 세계를 그 날 것의 냄새를 물씬 풍기게 그려낼 줄 아는 정유정 작가.

이번 이야기에서는 폭력에 괴질까지 돌아서 아주 난리가 납니다. 페이지마다 비린내가 푹푹

풍겨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지요.

앞선 이야기 때문에 부담도 많았을 터인데 그런 기대를 또 훌쩍 넘어서 줍니다. 독자란 본디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고생을 하며서 이야기를 탄생시키는지 모르는 작자들입니다. 그래서 뻔뻔하게

신작을 덮자마자 다음 이야기를 기대한다고 말해봅니다. ㅎㅎ

더 과격한 이야기든 아님 완전히 다른 달달한 이야기든 말입니다 ㅎㅎㅎ

- 다락방서 허뭄